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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 생각] 올곧게 분개하라

웅이가 여니에게

by 박 스테파노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사진=비블리 페이퍼

한 때 겉멋처럼, 의식 있는 청년인 양,

김수영, 신동엽, 박노해의 시집을 끼고 다녔더랍니다.


오래간만에 접한 김수영의 날 것의 시어를 마주하니

정말 미치도록 창피함이 다가왔습니다.


조그마함에,

저 먼 나라 일에,

뭐가 뭔지 모르지만 폼나는 것에,

내 것 아닌 거대한 담론에,

분개하고 집중하는

지금의 나.. 당신, 그리고 우리.


쪽팔렸습니다.

일상의 분개는 찌질한 짜증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합니다.


하루 일상은 비루하지만

그 켜켜이 쌓인 한 사람의 일생은 위대하니까요.


-곰탱이 남편의 어여쁜 아내와 나누는 아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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