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복지가 아니라 경제 담론
기본소득은 사회보장의 단순 복지 개념은 아니다. 이 지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토론은 공전하기 마련이다. 기본소득은 "경제정책"이다. 수혜자의 사전 기여가 없음에도 일단 일괄 지급하고, 추후 모든 수혜 대상자들이 국세, 간접세 등을 납부하여 갚아 내는 것이다. 기본적 경제활동을 통한 직간접적인 지속적인 재정기여를 담보하는 경제 정책이다. 이 지점이 완벽히 이해가 간다면 "보편적"이네, "선별적"이네 하는 군소리들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빅 테크들이 기본적인 고용-보상의 관례를 거부해서 '기본소득'을 장려한다는 이야기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기본적인 노동가치 보상을 하기 싫어서 정부의 기본급여로 갈음하자는 아주 하수의 생각이라는 이야기인데, 기업이 그런 뻔한 수를 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같은 이야기인데, 한번 더 꼬아 버린다. 기업은 정부보다 고도화된 주판을 머리에 지니고 있다. 기업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 "기본소득의 아이러니"때문이다.
기본소득의 장점은 아주 작지만 "일말의 당당함을 주는 것"이다. 개인에게 가해지는 경제적인 압박에서 탈출할 심리적 실제적 동아줄이 된다. 갑질이 있어도 맞설 용기가 있다면 횡포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기본소득은 기업의 갑의 횡포로부터 맞설 기본 체력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업이 기본소득을 찬성할 리가 만무해 보인다. 그런데, 은근 찬성하는 기류가 있다. 그 이유는 동전의 뒷면을 열면 알 수 있다.
기업이 속 끓이는 일 중 하나인 해고가 유연해진다. 어려운 해고 제도를 유지할 필요성이 적어진다. 쉬운 해고와 간편한 취직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시장 효율성이 증대된다. 소위 인력의 최적화가 구현된다. 경제가 활성화되고 경영 이익이 늘어나 파이가 커진다. 그러니, 노동시장은 더 유연해진다. 사회 급여가 잘된 유럽은 해고가 생각보다 쉽다.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같이 자본주의의 극단을 달리는 빅테크 IT기업 CEO들이 유독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이유의 본질은 다름 아닌 "비용 감축"이다. 그것을 잠재 시장인 여론과 노동자들을 자극해 '정당한 노동'에 지불을 주저할 이유는 없다. 왜? 해고가 쉬워지면 다 해결되니까. 인건비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티가 나게 '국가가 기본소득을 주니 나는 그만큼 빼고 줄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는 피고용인이지만 잠재적 소비자이다. 비용을 줄이다가 수익도 줄어든다. 이것이 고용의 역설이라고 한다. 정부가 기본소득을 하면 토끼 두 마리가 스스로 덫으로 달려든다. 최저임금 상승 억제와 해고의 유연성. 이게 기본소득의 뒷모습이다.
좌파들에게 신자유주의의 마왕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학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와 같은 기본소득의 기능을 인정한다. 갑질은 을의 순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을에게 저항할 기본적인 힘과 의지를 주면 사회 모순이 해결되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 이는 국가의 체제 유지의 틀을 만들고, 자유 시장 경제의 활력을 준다. 어떻게? 유연한 해고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것이 그럼에도 좌파들의 사회보장 어젠다인가?!
기본소득은 복지의 탈을 쓴 경제 정책이다. 국민경제라는 계정에 국가라는 큰손이 하는 투자로 봐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마중물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자 밀턴 프리드만은 인플레이션이 언제나 화폐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추가적인 지출이 조세나 민간 차입으로 보전된다면, 정부의 지출 증가는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급격한 화폐량 증가와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는다는 화폐경제학의 통념이다.
국가 주도의 경제부양책은 책상 서랍에 넣어도 된다. 세금을 들여 도로포장, 육교 건설ㆍ철거, 보도블록 공사 등 토건적 미개한 부양책은 역사로 사라질 것이다. 소비가 늘어나면 간접세를 많이 겆게 된다. 정부도 재원 규모에 선순환 영향을 준다. 기업들은 소비가 늘어나면 재고가 사라지고 비용이 줄고 매출이 는다. 투자와 신규 고용이 늘어난다.
또한 복지지출을 합리화해준다. 소득은 가장 높은 복지 서비스이다. 범용적이고 단순하다. 이를 통해 비효율적인 백화점식 복지서비스 체계를 최적화할 수 있다. 소득을 복지로 받은 개개인의 선택 영역으로 조정해 비효율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목적은 양극화의 최소화이다. 그 목적은 철저히 "경제적"이어야 실효가 있다. 그러나 반대 진영은 "누구나 똑 같이"에 꽂혀 '보편 vs 선별'타령이다. 그리고 현금지급이 아닌 현물이나 서비스를 직접 투입해야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전체 국민이 수 만 명이라면 더 타당하다. 우선 '선별'이라는 행정 행위 자체가 공정을 완벽히 담보 못하고, 그 선별에 드는 행정력이 편익 대비 엄청난 낭비이다.
코로나19 때에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대상자 선별하는 동안 우리는 마스크를 벗었다. 그럴 바엔 다 똑같이 나누어 주고 불요급자나 부정수급자, 그리고 소득과 부의 여력이 있는 사람에게 걷어 들이는 것이 속도와 공정 측면에 더 효율적이다. 아무리 반대해도 그 계산은 이미 나와 있다.
10만 원이 필요한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의 부의 기준에서 그 금액의 가치판단이 필요할 뿐이다. 10만 원을 기본급여로 주는 기저에는 앞서 말한 '경제 효과 기대'가 있다. 시장 논리에서 10만 원은 10만 원이다. 이재용이 내든 박철웅이 내든 10만 원의 지출은 시장에서 10만 원의 가치부여가 된다. 부자가 내면 감가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내면 제곱 승수 하는 것이 아니다. 이 10만 원의 세금은 부자에게 조세 정의를 확립하거나 행정 낭비의 효용을 완비한다면 버리는 돈이 아니다. 누군가의 주머니에 남는 돈이다.
한발 더 나아가, 기본 소득은 중앙ㆍ지방 정부의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기업을 정부의 기본소득 지출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로 놔두어선 안된다. 기본소득의 제공 주체가 꼭 정부여만 하는가? 기업이 "기본 소득"을 지지하는 진위를 떠나 그것을 현명히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좋은 제도라면 기업이 직접 제공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어떤가? 기업이 스스로 사회환원의 형태로 직접 지역 구성원에 복지 급여를 제공하는 지자체들도 있다. 선진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수급 대상뿐이 아니다. 부의 양극화는 행복추구의 보편성을 저해한다. 똑같은 노동에 말단은 수 천만 원을 받고, 수장은 수 백 원을 받아 간다. 그들이 수 천배의 임금을 받는 이유가 부양가족이 수 천배이거나, 밥을 남들보다 수 천 끼 더 먹기 때문일까? 화폐의 가치는 늘 시장 논리 앞에서 동등하다. 그들이 "위기관리"으 명목 급여를 받는다면, 이 사회의 위기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투자이고 복지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