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의 성장기
30년 만에 <데미안>을 잠시 펼쳐 보았다. 판본이 여러 개라 주요한 대목만 번 갈아 보았다. 번역이 다르니 그 말의 냄새도 다르게 다가온다. 20년 전 판본이 전영애 번역이 눈에 들었다. <데미안>을 읽지 않았어도 읽은 것 같은 거짓 자부심을 주는 대목이 그랬다.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로 널리 알려진 구절. 이 한 구절로 세대가 변해도 <데미안>을 읽어보았다는 사람들의 거수가 줄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전영애 씨의 번역은 날 것 그대로를 내어 놓았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되도록 원문에 가깝게 직역한 것이 직관을 주었다. 독일계 사람들은 히틀러 마냥 '투쟁(der kampf)'을 좋아한다는 가벼운 생각도 들었다. 무엇이 삶의 투쟁일까. 새는 알에서 죽음으로서 비로소 새가 되어 사는 것인가. '불나방', '철의 노동자'를 손톱 빠지도록 기타 치며 목청 올리던 '투쟁'만 가득했다. 내 기억에는.
<데미안>은 진리라는 것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 맹목적 진리 추앙자들의 경전이다. 그들이 스스로 믿고자 하는 솔깃한 이야기들을 뱉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정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거대한 과대망상의 발로인가.
진짜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책을 덮어라. 그게 아니라면 책을 열어 스스로 진리라 생각했던 구절에 맞아떨어지기를 기다리면 된다. 어렵지 않다. 밑줄을 긋고 근엄한 얼굴로 고개 끄덕이면 된다. 아니 읽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진리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마치 책을 다 읽어 본 척하듯이 말이다.
세상은 못 된 놈이 다 가진다는 생각, 착한 것은 쓸데없는 도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성장이 끝난 것이다. 그것이 진리인지는 몰라도 진실이다. 아니 적어도 사실이다.
알 속에서 그 사실을 다 알아 버리면, 깨고 나오기 위한 투쟁은 계속될까? 어차피 정해진 세상 알 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현명이 아닐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알 속에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데미안>을 읽었다면 알아들을 것이다. 구순기의 성장판이 닫히면 우리는 혼돈의 세상에 들어선다. 낮과 밤이 공존하는 하루가 있고, 선과 악이 뒤 섞이는 세계가 있다. 막스 데미안과 프란츠 크로머가 동시에 말을 거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모순 덩어리들의 뒤 섞임이다. 그 모순은 결국 책의 결말처럼, 전쟁 같은 극단의 선택지만 남을지도 모른다. 성장하고 싶다면 선택을 하라고 강요받게 된다. 자 선택할 시간이라고 하면서. 겁먹지 말자.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열면 되니까. 이게 진리다.
<데미안>에는 징글징글 한 니체와 도스또옙스끼의 냄새가 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카인을 이해하려는 데미안은 신마저 부정하는 존재로 보일 뿐이다. 동경하고 그리워하던 데미안은 이반이며 별종일 뿐이다. 금지하고 금기하는 모든 것에 도전하라 부추기는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이다. 금지된 것의 너머에는 늘 진짜가 있기 마련이다. 헤르만 헤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너머에는 진짜 "나 자신"이 있을 테니까.
어리숙한 시절에 헤세처럼 사유하고 헤밍웨이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될 리가 만무하지만, 그냥 바람이았다. 빠듯한 갑작스러운 가난에 그 바람만이 내 유일한 사치였다. <수레 바퀴 밑에서>와 <정원일의 즐거움>을 읽으며 얼굴 한 번 떠올릴 수 없는 스위스의 늙은 글쟁이를 동경했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를 펼치며 허무하게 냉소적이지만 힘 있는 문장을 품고 살았다. 어느 날 내 맘 속에는 헤세도 헤밍웨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착각을 준다. 아니다. 틀렸다. 늙어가기 시작한다는 것, 퇴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지 어른과는 상관이 없다. 어른이라는 것은 그저 성장판을 닫은 피노키오의 코 커질 변명일 뿐이다. 오히려 다행이다. 아직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아닌지도 모르니까. 부화가 안 되는 무정란이 아니라 늦어질 뿐일지도 모르니까. 이런 스스로의 위안을 보통 희망이라고 한다지.
글을 껍데기로 씌우고 있었다. 돈을 준다니, 온통 그것에 맘이 따라갔다. "나 좀 봐주세요"하며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하고, 관심 없는 그럴듯한 뉴스에 맞장구 질이었다. 토론은 차츰 도망가거나 애써 이해하는 척, 어른인 척 연극하기 일쑤였다. 문체는 친절한 척 만연하게 늘어지고, 어투는 샹냥한 척 경어로 쓰고 있었다. 다시 돌아본 글들에 역내가 올라왔다.
내가 손가락질하는 이 가짜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름을 까니 착각의 손오공 긴고아(緊箍兒)가 벗겨졌다. 다시 내 글로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한 두 개 글을 써 내리니 숙변을 밀어내는 배설의 통쾌가 있었다. 다시 나로 마주 보고 글을 쓰고 사유를 하겠지.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비루할지 몰라도 다시 나로 돌아가라는 헤세의 명령이니까. 그것이 행복일지도 모른다.
행복이라는 것은 "뒤돌아 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그랬다. 오가며 주어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간이 떠 오르지 않을 만큼의 '지금'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 행복하자. 쇠귀에 경도 그만 읽고, 어설픈 사람들의 말장난에 그만 발끈하기로. 그냥 뒤돌아 볼 생각이 나지 않는 오늘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이 쉰의 새로운 성장이 아닐까. 오래되고 커진 알에서 나오기 위해 오늘도 투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