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그 가깝고 먼 길
"혁신"하면 스타트업들이 떠오릅니다. 요즘 ‘스타트업’이라는 말이 창업 세계에서 혁신 기업 태동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드라마 제목까지 사용되고, 스타트업 창업이 대단한 기업가가 된 듯 대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만납니다. 그 뜻이 다시 궁금해 사전 의미를 재차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스타트업'은 최근 조어된 말은 아니지요.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로 창업 붐이 일었을 때 생겨난 말로, 보통 고위험·고성장·고수익 가능성을 지닌 기술·인터넷 기반의 회사를 지칭합니다. 한국에서는 '벤처기업'이라는 말로 먼저 정착된 개념입니다. 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이라는 기업 성격 규정이 일본을 거쳐 오면서, 의미의 범주가 오조준된 것이지요.
‘벤처 기업’은 기업 정의로 보아 투자가 이루어진 기업인데, 스타트업은 '벤처'가 되고픈 '기업 직전의 집단'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요. 그런데 요즘, 스타트업에서 벤처로 넘어가면서 벤처의 제1의 덕목인 ‘혁신’이 실종된 집단을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Exi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러 이견들은 있지만, 보통 스타트업이 "기업"으로 환골탈태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방법은 보통, 대규모 투자의 실현, 아이템의 적정 매도, 기업의 인수합병, 그리고 아주 희박한 기업공개 등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창업자들은 "투자금 입금"이 Exit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투자금'은 빛 좋은 '빚'일 뿐입니다. '혁신-Innovation'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기업 생태계뿐일까요? 정부와 정치세력의 ‘혁신’ 타령은 그저 도루묵이 됩니다. (아내가 애정하는 생선에게 미안하지만) 혁신이라는 말에 '새로운 기술', '발명과 개발'이라는 지협적인 요소에 꽂혀 버리고 맙니다.
“또 다른 햄버거를 내놓지 않는 것”이다 (Tom Peters, “The Circle of Innovation”, 1997).
혁신이라는 말의 어원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혁신은 가죽 혁(革)과 새 신(新)의 합성 한자어로, 갓 벗겨낸 가죽(皮)을 무두질해서 새로운 가죽(革)을 만들어 낸다는 어원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고칠 개(改), 가죽 혁(革)’, 즉 ‘가죽을 고친다’라는 뜻의 '개혁'이 '무두질'의 어원을 품고 있습니다. 완전히 바꿔 새롭게 한다는 뜻의 이 말은 언뜻 봐서는 과거를 쇄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혁신은 새롭게 되도록 갈아엎거나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다른 유래가 더 그럴듯하게 전해집니다. ‘연혁(沿革, 硏革)’에는 ‘변천과정, 면도날을 갈기 위해 쓰는 가죽’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면도날을 가죽에 쓱쓱 밀어 갈아 내는 장면을 마주하곤 합니다. 그 가죽이 '연혁'인데, 가죽의 미세한 결과 돌기가 칼을 갈아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죽이라는 것은 마모되고 마찰할수록 부드러워지니, 면도사는 가죽을 교체하게 됩니다. 그것을 '혁신', 가죽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합니다(원래 허리띠에 칼을 갈았던 유래로 '허리띠를 바꾸다'라는 의미도).
가죽들을 업력을 과시하기 위해 걸어 놓은 것이, 가게의 지나온 '연혁'이 된 것입니다. 과거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기반으로 '거듭나는 것'이 혁신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혁신"은 기술이나 경영의 한쪽의 눈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의 혁신은 사회의 혁신으로, 그리고 제도와 조직이 개선되고 고도화되는 거버넌스의 영역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될 테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자타칭 "혁신 기업"에 대한 재조망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저 아이디어만 반짝이는지 아니면 조직과 제도마저 그 혁신의 방향성에 정렬되고 준비되어 있는지 말이지요.
퇴직 직전에 데이터 거버넌스 관련 비즈니스 이니셔티브를 총괄했었습니다. 정보 관리(Information Management - Information Governance)라는 영역에 임하다 보면 정보(information)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유형의 개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어로 Complete Object(객체 완성)가 결국 정보의 최종 목표라는 것인데, 이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각각의 생활과 삶이라고 생각을 대입해 보면 비슷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보(Information) = 객체성(Personality)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지요.
공유하고 나누면 할수록 가치가 배가되지만, 반대로 민감하게 보호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
과학기술과 사회정치학적 고찰이 발달하면서 System이라는 것을 만들고 Platform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안에 가두려고 하지만, 가두면 가둘수록 그 형태는 변용되어 진화하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거나 아얘 숨어 버리기도.
일반화하여 가두기에는 변화의 양상이 다양하고 활발.
둘 다 정형적인 모습보다는 비정형적인 모습이 훨씬 많이 존재함.
이 객체를 잘 이해하고, 분석하고, 재활용하는 것이 이제 권력이 되는 세상
"기술혁신은 기술과 조직과 제도가 상호작용한 결과물이고, 기술혁신의 역사는 이 세 요소의 공진화(co-evolution)의 역사이다." -김석관 교수님 인용 중-
요즘 여러 상황을 반추하면서 'X-플랫폼'이라는 말을 곱씹어 봅니다. X에 혁신을 대입해 보면, 지금 기술ㆍ경영ㆍ사회ㆍ정치의 영역에 적용하는 혁신이라는 것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혁신이라는 플랫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에 대한 체득과 변용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뭉퉁이의 전체가 아닌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 즉 "객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조직과 제도는 반드시 커플링 되고 싱크로나이즈 되는 혁신의 단짝이 되는 것 아닐까 합니다.
각각의 객체로서, 개별 가치로서의 정보는 플랫폼에 담아 둘 만큼 일반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두 정형화할 수도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고, 변하고, 쏠리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며, 때론 증발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에서 어쩌면 조직화하고 세력화하는 것이 이들의 객체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당위를 주는 필수 조건이 될지도 모릅니다. 혁신은 기술이나 아이디어 신념이 각각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거버넌스라는 고차방정식의 함수통에서 증폭되는 것이 아닐까요.
혁신이라는 것을 제품, 서비스의 레퍼런스로 억지로 규정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현상과 변화의 있는 그대로의 이해가 우선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런 다음 그 이해를 바탕으로 초월 데이터(Meta Data)를 쌓아가고 분류표(Index)를 만들어 잘 해석하는 것이 "혁신학"의 모습이 아닐는지요.
그리고 상황에 맞는 우선순위 별로 그 사용의 가치와 순서를 정하고 서로 합의하는 일. 이런 것이 정책 규준(policy)이고 운영 방침 제도(governance)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은 조용해졌지만 매트릭스(matrix) 조직이라든지 애자일(agile) 조직이라는 것의 출현에는 혁신(innovation)이라는 트리거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