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 획정 및 비례대표 정족수
선거구 획정 및 비례대표 정족수 관련 선거법 개정은 발의와 좌초가 일상이 되었다. 예견된 일이 아니었던가. 현재의 권력을 미래의 권력으로 지속하게 만드는 일이 국회에 모여든 사람들의 유일한 지상 목표가 아니었던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 두고 멀찍이서 혀끝만 팔 수밖에 없음이 한탄스럽다.
그런 생각의 끝에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대안이 생각났다. 묘안도 아니고 혜안은 더욱 아니며 그저 말만되는 대안이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듯싶다.
‘발상을 전환’하면 대안에 근접하기 쉬워진다.
“국회의원 정족수를 500인으로 늘리자.”
300명의 국회의원 정족수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여론은 몸서리치며 과민대응한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의 정치꾼들이 국회의원 정족수 확대를 원할까? 아마 정반대일 것이다. 더 이상 정족수가 늘어나지 않길 바랄 것이다. 왜냐고? 권력을 탐하는 탐권세력들은 권력을 나누어 가질 분모의 증가를 달가워 할리가 없다. One of 300에서 One of 500이 되면 크나 큰 박탈감만 가득할 것이다. 사람들은 권력 독점의 욕구를 버리기 쉽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맛을 아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현재의 257명의 지역구를 유지하고 243명의 광역 연동형 비례대표로 선출하면 된다. 기득을 주는 대신 한 사람이 가진 권력을 분산시키자는 것이다. 물론 세비의 총액과 국회 지원예산의 총액은 현행 유지하는 조건이다. 1인 당 세비는 1/2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고, 지원 보좌인력과 예산도 반토막 날 것이다. 연봉 8,000만 원의 연봉 수준이면 생활과 활동 여력은 충분하다. 고액은 아니지만 중상의 급여조건이다.
헌법에는 200인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개헌 정국 당시 10만 명당 1인이라는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다. 5천만 인구에 500인은 허황된 숫자가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총원이 늘어나면 기존의 정치공학으로 계산되지 않는 돌발 변수가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 변수는 혁신의 기폭제로 작용할 가능성을 내포할 것이다. 지역이나 직능의 유착도 독점이 아니라 경쟁 구도를 만들어 내면 상호 견제는 자동이 된다.
대의 민주주의 제도는 대중의 여론 몰이를 방지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유래는 고대 아테네의 몰락의 원인을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로 판단하는 데에 기인한다. 즉, 대중과 민중은 대체로 어리석다는 엘리트 의식의 발로였다. 소수의 현명한 엘리트가 민의를 수렴하여 정치 결정을 하는 행위가 현재의 대의제로 발전되었다. 대의제나 선거제, 그로 인한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 그 자체로 오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그저 ‘외적 형식’ 일뿐이다.
이제 더 이상 민중은 어리석은 무리가 아니다. 민중은 ‘시민’이 되었다. 시장 이론의 기초가 ‘이성적’ 참여자이듯, 올바른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는 '계몽된' 시민이다. 시민들은 자유와 평등, 다양성과 조화의 함양을 지향하며 어떤 선택이 그에 부합하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선거나 다수결 같은 장치들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게 해야지만 선거에서 이긴 자가 시민에 앞서 자신이 속한 지역, 정당, 집단에 더욱 충실히 헌신하도록 한다.
대리로 민의를 전달하고 실행할 대의선출자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그리고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더 좋은 일이다. 소수를 겁박하고 배제하며 다수의 절대적 권력 아래 소수를 굴복시키는 건 다수에 의한 독재다. 다른 독재와 마찬가지로 자유의 최대 적이 된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애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일 수 있다. 근본을 잊은 편견의 추종이 그럴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다고 내 제안이 그럴듯 함 이상의 유의미를 가지기엔 턱없이 부족 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결핍과 궁지는 혁신이라는 총아를 낳곤 하니까. 짧은 생각에 모든 비판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