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한 재성찰이 필요한 때
정경심ㆍ조국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솔직히 "피로감"이 있다. 그간의 글에서 인지하겠지만 나의 정치적 지향은 진보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보수 Vs. 진보의 양분 구조나 그 해석도 마뜩지 않다.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나는 기득에 대한 반동이고, 주류에 대한 대척이며, 강자에 맞서려는 작은 존재의 한 목소리로 정치 활동을 했었다. 그럼에도 정경심ㆍ조국 부부의 일은 좀 피로하다.
"조국ㆍ정경심 부부에 대한 처벌적 판결이 부당하다."라는 이야기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틀린 말이라고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양가의 해석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정경심ㆍ조국 부부가 처벌받아선 안된다는 주장, 또 다른 하나는 정경심ㆍ조국 부부"만" 처벌받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나는 고백컨데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 "공정"에 대한 가치 투쟁이었다. 정경심-조국 사법 논란에서 남은 것은 스모킹 건과 트리거가 되었던 "불법 펀드 운용"은 유죄 성립이 안되거나 재판과정 중 기소 이탈되어 증발해 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자녀 입시 부정"이었다. 사법 판결의 갈라치는 해석을 뒤로하고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정경심-조국 사건으로 보아 자녀 입시와 학업을 위한 부정한 일들이 정치의 진영과 그 입장을 떠나 기득권에게 만연하고 일반적인 일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본질은 여기에 있다.
1980년대 중 후반의 중고교 시절, 집안의 가계는 절정을 이루었다. 교내에서 자산 순위로 한 손에 꼽히는 학부형이 된 모친은 치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나는 늘 주류의 학생이었다. 공부 머리도 제법이고 나름 수업 시간을 좋아라 해서 성적도 800명 전교 석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운동도 잘하는 학생이고, 키와 덩치도 있었고 지기 싫어하는 성미라 주먹도 제법 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나의 모친은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3 여름에 교실마다 에어컨이 달린 것도 모친의 작품이었고, 체육대회에 선생님들 식사는 늘 출장 뷔페가 오곤 했었다.
고3 2학기에 당시 EBS강의를 병행하던 영어 주임 선생이 자리로 부르더니 이상한 제안을 했다. 하루에 30분씩 아침자습 시간에 자리로 와서 부족한 부분을 상담하자는 제안이었다. 현직 교사의 불법 과외의 다른 말이었다. 2~3일 시키는 대로 하다가 괜한 소년의 정의가 솟구쳤다. 해결할 방법은 딱 한 가지. 부친에게 고하고 반칙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다. 모친은 그때 이야기를 수십 년 지나도록 하신다. 서울대 못 간 것은 네 아버지를 꼭 빼어 닮은 융통성 없는 주변머리라고.
그때의 심성을 다시 돌아보자면, 예쁘게 분칠 한 기억으로 둔갑되어 있기 마련이다. 솔직한 바닥의 심리는 "쪽팔림"이었다. 아침자습 시간마다 자리를 빠져나오기가 창피했다. 그리고, 지금 성적으로도 내가 원하는 대학 정도는 갈 것이라는 자존감도 있었다. 외고와 과기고를 진학하지 않았던 이유는 우습게도 친구들 때문이었다. 사실 대학보다는 해외 선교 수도회에 갈 줄 알았으니까.
사교육이 전면 금지되던 시기에 이웃집 대학생 형누나들의 과외마저 부도덕한 일이 되었다. 그런 그 시대에도 입시의 비리는 창궐했었다. 지금은 바로 수능 성작을 알 수 있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의 학력고사 정식 성적을 알 수 없다. 국가비밀로 묶여 있다. 그런 시대의 야바위는 얼마나 쉬운 일이었을까. "정원 외 입학"은 어떤가. 해외체류자들 중 일정 요건을 채우면 국사, 국어, 수학 등 아주 쉬운 시험을 치르고 상위권 대학 학과의 정원 10% 안에서 추가 입학을 시켜 주었으니 말이다. 외교관 자녀, 주재원 자녀, 조기 유학파 등 "기득권"들의 수월한 방법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내가 되는 일은 "쪽팔린 일"이었다.
정경심-조국 부부를 단죄하자는 쪽은 물론, 그의 처벌에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중 희한하게도 "사회 구조의 문제"를 내 세우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지금의 일이 벌어진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본질이고 핵심인데, 초점은 온통 두 부부의 "개인 윤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사법 권력의 과도한 정치 탄압이기에 수사, 기소와 판결을 부정하는 쪽은 물론 그들을 반드시 처벌하고 지금의 판결은 오히려 부족함이 있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쪽도 마찬가지이다. 역설적으로 이 양극단은 정경심ㆍ조국의 사건으로 고스란히 투영된 기득권의 행태적 구조는 제쳐 놓은 사회적 대타협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피로감이 세게 온다.
교수의 정보력과 인간관계를 활용하여 자녀의 입시에 보조적 협력을 한 것이 죄냐고 묻는다면 나는 범죄 까지는 모르지만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고 답하고 싶다. 세상의 평범하거나 그보다 하위의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녀는 방학에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얼마나 될까? 부모의 지인의 조직에서 인턴을 수료할 학생은 몇몇이나 될까? 이에 대한 반대의견도 존중은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그런 조력을 받았는데도, 결과라는 것이 지방의 의전원에 진학했다는 것에서 본질의 그림자를 찾게 된다.
정경심ㆍ조국의 딸 조민 씨가 화제에 올랐다. 스튜디오에서 예쁘게 찍은 프로필이 포털 뉴스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외모 품평과 함께 나오는 인터뷰 한 대목이 "떳떳하다"였다. 솔직히 이 지점이 매우 아쉽다. 그녀가 떳떳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의전원에 진학할 만한 자격과 자질"에 대한 자신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가려 버린 처절한 진실들이 있다. 조민 씨는 그것을 놓쳤다.
운동선수들에게 금지 약물이 적발되어 평생 낙인처럼 찍혀 있는 이유가 단지 한순간의 일탈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의 금지 약물이 "훈련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약물이 적출되지 않는다 해도, 현재의 근력, 순발력, 지구력을 몸속에 차곡차곡 쌓아 둔 것이 그 약물의 효능 때문이다.
입시라는 한국 학업의 여정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자격과 자질이 정보량과 방법적 수월함을 가진 부모의 사회적 지위로 인한 보조적 협력이 영향을 미쳤다면 사회적 관점에서 "불평등"을 가속한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한 성찰과 소회는 이들 가족, 지지자는 물론 반대 진여에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모두가 "공범"이 되니까. 자녀를 위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다 이해가 간다는 말을 너무 쉽게들 한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것은 단지 능력을 판매하는 "서비스"가 아니다. 교육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기회의 재분배"에 있으니까.
조민 씨가 기초과학을 전공하다 의전원에 진학한 것을 탓할 생각도 이유도 없다. 아쉬움이 남지만 오로지 개인의 선택이다.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서포트를 무조건 폄훼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조국 교수를 조금 대면해 본 입장에서 실망이 큰 것도 사실이다. 십여 년 전 풀뿌리 정치 운동을 하며 소위 "강남 좌파"의 상징이 된 그가 외친 일성은 "기득권 타파"였다. 부와 권력의 세습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런 이유로 사법시험을 치르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그의 주장과 행보에 존경을 보냈다. 그러나, 장관직을 수용할 때부터가 사실은 방향이 변질되었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의회에서 정치를 하였으면 어땠을까.
586 선배들과 그 윗대의 "민주화 세력"들의 공통점이 많은데 가까이서 지켜본 것 중 두드러진 것이 엄청난 "가족 유대감"이었다. 여러 탄압과 핍박으로 오로지 견딜 수 있는 품은 가족들 뿐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가족들과 엄청나게 끈끈하고 절대 지지세력으로 늘 한편에 서 있었다. 특히 세월이 가면서 "자녀"들에 대한 무한 애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마도 자신의 신념적 활동으로 비교적 힘든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겪게 했다는 미안함의 작용이 큰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들에 대한 공격, 특히 자녀들에 대한 문제제기에 엄청 민감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성을 잃는다. 노무현, 문재인, 박원순 등... 이 분들의 자녀와 연관된 일들의 보도보다 실제 더 격노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지점에서 조국 교수는 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때는 그에게 "새로운 정치"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녀들의 문제 앞에서 또 가로막혀 버렸다. 만약에 정경심ㆍ조국 부부가 자녀들의 입시에 대한 조력과 협조에 "구조적인 문제"를 반추하고 자성의 목소리도 함께 내었다면 어땠을까. 조민 씨가 "나는 떳떳하다"라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동시대를 사는 정보의 접근 기회조차 쉽게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유감 표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부모찬스", "지인찬스"라는 말이 불편히다. 때로는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에서 자녀의 입사에 어드벤티지를 준다면 부정한 일이 될까? 내가 다니던 IBM이라는 미국회사는 "기업윤리"에 엄청나게 민감한 회사이다. 그런 회사에서 자녀, 친지는 물론 지인까지 "재직자 찬스"를 준다. 재직 직원이 추천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서류전형을 통과시켜 준다. 딱 거기까지이다. 재직 직원에 대한 일종의 후생 지원일뿐이다. 다음의 진짜 골문은 오로지 채용하는 현업 부서장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런 것들이 통용되는 이유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종사한 조직에서 그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자녀의 입사에 유리한 혜택을 주는 것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공론과 협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된다. 지금 정경심-조국의 사건을 보면서 "사법 정의"의 깃발만 올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또한 그것을 "기득권에 만연한 입시 비리 처단"이라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난타전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문제는 오로지 "교육"이 "사회적인 기회의 재분배"를 어떻게 수행할지를 논의해야 하는 것이 본질이 되지 않을까.
"공정"은 자칫 더 상위 가치인 "평등"을 가릴 수 있다. 그것을 보정할 사회적 도구의 시스템이 "교육"일 것이다. "교육"을 생가할 때 실력과 능력의 함양이라는 "훈련(Training)"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훈련의 정도와 결실에 대한 공정한 기회를 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입시와 졸업이라는 교육의 과정은 마지막으로 "출발선"을 하얗게 다시 그어 주는 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 논의는 달나라에서도 찾기 힘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