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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Feb 16. 2023

[윌요단상] 본인인증

흉내가 아닌 재현

늘 그렇듯이 심드렁한 심산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중고서점으로 유명한 곳에서 글쓰기 플랫폼을 론칭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나 호기심을 앞장 세워 온갖 셈법을 가다듬으며 플랫폼을 둘러보았다. 아직 어수선함이 있지만, 일단 운영자들이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중재'와 '조정'에 힘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안정권에 들어온 기업의 업력이 뒷받침이 된다고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출시되어 기능이 다채롭고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마음이 가는 것은 보상의 구조가 "직관적"이라는 것. 유튜브와 네이버, 문피아를 벤치마크한 듯한 유료전환, 응원하기 등이 눈에 띄었다.


큰 고민 없이 가입을 하고 이곳에서 묻힌 아쉬운 글을 새롭게 가다듬고 편집해 올려 보았다. 다양한 기능의 편집기와 앱의 팬시함이 더해져 글이 겉보기에 더 그럴싸 해 보이는 것은 느낌 뿐일까. 어찌 되었든 향후 정산을 위해서는 "작가등록"을 하라고 안내가 되어 있었다. 작가를 등록하려다 보니, 옛날 가입한 회원 기록이 남아 있었다. 오랜 시간 명함과 함께 제공된 법인 명의의 핸드폰번호가 남아 있길래 한 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본인인증"을 하라는 것이었다. 본인 명의 휴대폰으로 인증을 하라는 단계에서 막혀 버리고 말았다.


본인인데 본인을 인증할 수 없다 (사진=카카오톡)


현재 상황의 곤궁으로 휴대폰을 아내 명의만 살려 두고 내 것은 정지상태이다. 통신비조차 아껴야 하는 현실이 또다시 쓸쓸하다. 그러다가 생각은 다른 곳으로 튀었다. "본인인증은 무엇을 인증하는 것일까?" 하는. '본인'의 실체인 내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디지털 세상, 온갖 행정 업무의 세상에서는 다른 무엇이 나의 존재를 대신 증명해 준다니 묘한 생각들이 들기 마련이다. 육안 식별되지 않은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의 암호가 나를 증명할 뿐, 실제의 나는 아무것도 거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인간이 가진 보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닐까?


종교학과 기호 언어학을 아직도 '공부'하고 계신 박철현 선생의 말이 떠 올랐다. 자신만이 지닌 보물을 세상에 드러내는 세 방식이 있고 한다. 표현(表現), 재현(再現), 그리고 구현(具現)이 그것이다. 이 세 단어의 공통적으로 쓰인 말은 ‘나타난다’를 의미하는 ‘현(現)'이다. ‘흔히 현’은 ‘왕(王)'과 ‘볼 견(見)’의 조합으로 인식되기 마련이지만, 실제로는 ‘옥(玉)'을 갈아 내어 남들에게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표현, 재현, 구현 모두 자신만의 세월이라는 경험이 만든 진주를 드러내는 방식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 쓰임새와 말의 쓰임새와 그 깊이는 서로 차이가 있다. "표현"은 자신의 경험을 말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표현’을 ‘디에게시스'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을 정의하면서 사용한 단어는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다. ‘재현’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는 ‘미메시스’이다.


사실 '미메시스'라는 단어는 인류의 역사가 거듭되면서 오용되고 왜곡되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밈"이라는 신조어가 나오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메시스’를 흔히 ‘흉내 내다’라는 의미로 인지하고 있다. 영어단어 ‘미믹’mimic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원본, 원형, 혹은 이데아에 대한 불완전한 복사(複寫) 정도로 알고 있다. '모방'이 창작의 한 과정이라는 말이 구실로 두는 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메시스’는 ‘흉내’가 아니라 원본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재현’이란 이데아(이상적인 본질)를 자신의 몸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말-행동이 하나가 되어,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가 성경이 전해 주는 '표현'의 말보다 더 실감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본인인증을 위해서는 흔히 "고유식별자"라는 것을 매개로 한다. 고유하게 나를 식별해 주는 것은 본질인 내가 아니라 주민번호, 여권번호, 운전면허번호와 그것을 기반으로 만든 디지털 데이터 조합체인 각종 인증서들인 것이다. 금융 기관에 실체인 "내"가 방문한들 위에 열거한 고유한 식별도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내 존재에 대한 인증은 실로 존재하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말들의 기호인 식별자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본인의 실체에 대한 인증이 이러한데 각자의 보물과 같은 생각과 사유는 어찌 취급받고 있을까.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하나가 되어 내 안의 보물을 몸소 드러내는 "구현"의 과정은 "창작"의 과정이 된다. 글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세상의 글들은 말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 말들이 모두 "자신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체득하지도 못한 채 그럴듯한 고준담론에 미사여구를 늘어놓아 '자극'을 유도하는 일은 절대 '구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모방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출처=미디어리터리시)


글쓰기를 수련하는 방법 중 "모방과 흉내"는 좋은 연습도구이다. 플랫폼 위에서도 서로의 글들에 영향을 받고 따라 쓰는 일은 시작으로 삼기에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습의 도구가 아닌 "본인인증"의 만능키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글쓰기 플랫폼에서도 '복제품'이 넘쳐 난다. 각종 기사를 두서없이 짜깁기한 누더기부터, 온갖 "~위키" 사전들을 긁어 그대로 붙여 낸 복사지들도 있다. 그뿐인가 글의 반이 따옴표 투성인 "~하더라"의 이야기도 자신의 사유와 통찰인양 드러 내고 있다. 타인을 속이고 넘어간다 치더라도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것은 그저 애처로운 리플리의 복제로 남을 뿐 아닐까.


글을 쓰기 위한 플랫폼의 입문이 '본인인증'이라는 디지털 세상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듯이, 글을 쓰는 자신의 관문도 스스로 만들어 "구현의 가치"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기 검열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진짜 나를 식별하는 소중한 일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숫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나의 식별자들로 들어 선 글 세계에서 진짜 나를 표현, 재현, 구현하는 일은 스스로의 "자기 인증"이 필요할 것 같다. 흉내와 모방은 이제 ChatGPT 같은 녀석들이 충분히 해 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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