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늦은 아침 생각]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

웅이가 여니에게

by 박 스테파노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종의 기원> 정유정-


일전에도 나누었던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의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을 단숨에 읽었던 기억을 더듬습니다.(기억해 보니 단숨이라기보다, 강연을 오가는 기차에서 약속을 오가는 전철에서.. 이것도 망각) 한동안 독서를 멀리하다 다시 읽기를 시작할 때면 윤활유가 되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잡곤 합니다.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괴감과 열등감에 번쩍이는 채찍이 되기에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작가의 작품에는 '악인'들이 등장합니다.

이전 작품들인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에 주변인 혹은 관계인으로 등장하였던 '악인(惡人)'이 이야기의 외부자가 아닌 '나'로서 화자로 등장하는 작품이 바로 <종의 기원>입니다.


이야기 내용이야 읽어 보실 분들을 위해 자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사실 <종의 기원>의 주인공 '유진'을 보면서 많이 섬뜩하였습니다. 무언가 깊은 비밀을 들킨 기분이기도 하였습니다.


작가는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을 빌어 말합니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라고,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흠결 없이 생활해 온 분들은 조금 의아해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의아한 척해야만 할 것 같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프로이트의 이야기로 그 속마음을 읽어 봅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프로이트-


사순시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은 날들입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사악한 나를 발견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악한 인간이 보통인간이 되는 순간에는 늘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반성에서의 사과도 요구됩니다.


요즘 세상 시끄러운 일들에 귀를 닫고만 싶어 집니다. 사람만도 못한 사악함에 치가 떨려 옵니다. 그 사악함은 언제고 ‘망각’을 해결책으로 시간 기다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40년 가까이 된 학살과 도륙의 독재자가 ‘망각’을 무기로 세상을 비웃다가 결국 편히 잠들 듯이 말입니다.


침묵하고 애써 외면하는 나도 어쩌면 공범일지도 모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변명으로,

사회생활의 지속이라는 핑계로,

나는 그저 자판 앞에서 속상한 표정만 지을 뿐입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저들이 속편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못과 부끄러움을 자각하지 못한 자는 부끄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데블스 에드버킷>포스터, <종의 기원> 내 사진, 광주 (사진=오마이뉴스)-

-곰탱이 남편의 어여쁜 아내와 나누는 아침 생각-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늦은 아침 생각] 의심이란 '인내'의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