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에 글을 쓰는 이유는 '나에게 주는 보상'
치열했던 IMF 시기의 취업 전선에서의 기억이 들었다. 스펙이랄 것이 있을 리 없는 X세대 고학생에게 '이력서'는 참 허전해 보이기만 했다. 자기소개서야 이런저런 기억과 추억의 각색을 담아 메워 보지만, 서늘하게 느껴지는 칸칸이 넣어야 하는 필수 조항은 채우기가 참 어려웠다. 이렇다 할 경력 없고, 어떤 분들처럼 석ㆍ박사도 아니고, 인턴이라는 제도조차 생소한 시대에 과외, 공사장, 음식점 알바를 쓰기도 참 뭐 하다. 억지로 운 좋게 다녀온 교환학생 한 줄을 최대한 길게 써 보곤 했다. 그러다가 만나는 항목, '취미'와 '특기'가 타이핑을 막아섰다.
요즘 청년들은 그런 것을 이력에 쓰는가 싶기도 한데, 그때는 거의 '필수 조항'처럼 버티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떤 것들로 채워 가셨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거의 전형적으로 채웠던 기억이 있다. '취미: 독서, 영화ㆍ음악 감상', 그리고 '특기:.....' 고민 고민 끝에 적어 넣었다. '운동'(조직에선 운동 잘하고 좋아한다는 요상한 훈수 덕에, 군필자의 느낌으로)이라고 적고, 고민했다. 왠지 하나는 부족해 보이니, '글짓기ㆍ작문'이라고 말이다.
어릴 적 조부님께서 붓글씨와 펜글씨를 쓰면서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때마다 '글씨를 잘 써야 좋은 직장을 얻는다'는 세뇌가 작용했는지, '신언서판'의 글씨의 연장이 글짓기라 억지 연결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릴 적 글쓰기로 받아낸 상장과 군 시절 연애편지 대필로 'PX추진비'를 아꼈던 기억인지 몰라도 그렇게 적었다.
나중에 인사권자가 되고,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이 되어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 진행을 다반사로 하게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취미ㆍ특기를 눈여기는 인사권자는 흔치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그 시절의 한 줄 적어 넣은 '특기'덕분에 이렇게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부친에게 보내던 그림 같던 첫 편지가 나의 '작필'의 시작이었다면, 어릴 적ㆍ소년, 청년 시절 서슴없게 느꼈던 글쓰기의 특기 설정이 진정한 '작문'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이력서도 일종의 '사회적 글쓰기'가 되려나 하는 생각에 미소가 입가에 떠 오른다.
글쓰기에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 '방향'을 만들고, 그 방향으로 어떻게 진행할까에서 글의 '무게'와 '질감'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을 쉬이 줄여 '글의 종류', '장르'라고 통칭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생각을 물고 이런저런 질문이 든다. 그럼 나의 글쓰기는 어떤 모습일까? 장르와 종류로 구분이 되는 것일까? 방향이라는 게 정답이 있을까? 그리고, 나에게 글쓰기는 여전히 즐거움일까? 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글쓰기를 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조기 은퇴자에게 귀가 번쩍 뜨일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사회적인 글감을 나누는 안전한 공론의 장이라니. 선배의 SNS에서 연일 팝업처럼 떠 오르기에 어는 글쓰기 플랫폼 프로젝트 개시 후 2주 후에 첫 글을 올렸다. 반응이 시큰둥 같기도 하다가, 몇몇 진심의 공감도 받고, 1만 원의 행복이 되는 선정도 받게 되었다.
그 맛에 매일 올렸다. 일주일에 과반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 그러다, 욕심이 생겼다. 20만 원이나 주는 투데이 픽은 왜 안주나 싶었다. 에디터들에게 구애를 했다. 답글 열심히 달고, 댓글도 달고, 좋은 인사이트다 과장된 찬사도 날리고, 그러다 반응이 없으면 칭얼대고, 징징거렸다. 일종의 밀당이었다. 술을 끊기를 잘했다 싶을 정도가 되었다. 자칫 필화에 휘말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맘도 비우고 욕심도 비우고 내 자취도 비우려고 하는 1차 프로젝트 말미에 20만 원의 픽을 맛보았다. 결기와 비워냄은 온 데 간데 없어졌다. 꼼수의 계산기를 작동했다. '휴지기에 기반을 잘 다지면, 2기 프로젝트에서는 수월할 수 있어'라고 말이다. 회상하며 쓰면서도 얼굴이 화끈 부끄러워진다. 뭐 예상이 맞았는지, 운영의 방향과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문에 글도 자주 소개되고, 정산한 보상이 상대적으로 훌륭했다. 성공일까? 아니다. 그러는 동안 나의 글쓰기는 즐겁지 않았다. 솔직하게 괴로웠다.
개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외적인 보상은 즐거움에 반비례하고 괴로움에 정비례하는 느낌 반, 확신 반이 들었다. 원하지 않는 뉴스도 '이슈'의 날이 서있는 것 같으면, '선점'을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기 일쑤가 되고, 대문에 걸리는 글들과 에디터들의 뉴스'클리핑'에 신경을 쏟아 내었다. 그 콘텐츠의 본질적인 '글'의 품질, 글쓰기의 양태와 문장과 편집이 좋은지는 따지지 않고 공감하는 척 따라갔다. 돌아보니 또 화끈거린다.
2009년 전후 SNS, 사회 관계망 서비스라는 것이 유행을 타면서 글을 쓰는 욕구가 늘어났다. 140자로 축약하던 간추린 소회는 한 바닥의 포스팅이 되고, 이내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것에 대한 뽐내기, 그리고 남보다 조금 빨리 알아낼 것 같은 정보를 수집하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다 소화한 냥 훈수질에 지적질이 시작되었다.
어줍지 않은 '데이터'를 분석하네, 들여다 보네 하며 어설픈 그래프를 그려 내었다. 전문 용어와 영어를 원어 그대로 써 대면서, 친절한 설명 따위는 배척했다. 남들의 주장에 오탈자 같은 티끌만 한 수치 부정합과 자료를 비난하고 트집 잡기 다반사였다. 돌아오는 반대와 비판에 완전 이해도 하지 않은 최신 미국 기사, 논문, 아티클을 링크 걸어 이죽대기 일쑤였다. 생각해 보니 참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2010년에 다소 무리한 행보와 욕심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가기를 몇 번, 원인을 찾아 종합병원 예진과 검사를 십 여 차례 하고서야 난치 희귀 질환자로 확진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일차적인 변곡점을 맞이했다. 병가를 내고 치료에 전념하면서, 날 선 관계들을 무디게 만들고,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것들을 하늘이 준 '시간 선물'로 해 보자고 생각했다. 그때 '글쓰기'를 다시 배우기로 했다.
당시 신생 매체였던, '프레시안'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학교'에 등록했다. 선택한 과목은 "영화 보고 글쓰기"였다. 첫날 가보니 본인 포함 다섯 명의 클래스는 존폐의 위기가 엄습했지만, 버티고 버티어서 마무리했다. 십 수년만에 글쓰기를 숙제로 받고, 기일에 맞추어 전달하고, 빨간펜(진짜 빨간펜)으로 검사와 평가, 첨삭 조언을 받았다.
첫 번째 과제물이 온통 시뻘겋게 보이도록 첨삭된 채 돌아오는 것을 참아 내니, 다시 글쓰기에 대한 재미와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그때의 글 선생님인 평론가 오동진 선생의 지도와 그의 글쓰기를 흉내 내며, 저널리스틱 글쓰기와 사회의 고민을 개인의 체득으로 나누는 방법을 얼핏 배우게 되었다. 그 조언과 개인의 취향을 더해 차곡차곡 틈나는 대로 써왔다. 그 목적은 한 가지였다. '즐거움'이라는 내적 보상, 그 하나였다.
한 동안 그 치기 어린 지식인 놀음과 자의식 잔치를 잊었다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다시 계산만 가득한 '방법'을 '목적'이라 착각했다. 자신의 프로필과 명함의 직책, 이력서의 학력이 상대적 우월이라 생각하는 미숙한 경쟁에 또 휘말리고 있었다. 뽐내기 위해, 돈 벌기 위해 어른이 되어 버릴 시간까지 써 버린 일부의 사람들과 바보 공기 시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부끄러웠다. 아내에게 고백을 하니, 그윽한 눈으로 다독여만 주었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마, 이곳에서 외적인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측 컨데, '글'의 품질이 플랫폼의 알고리즘(알고리즘이라는 게 있다면)의 우선순위로 정책화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큐레이팅'이라고 하는 최근의 콘텐츠 트렌드는 '눈길 잡기'가 목적이지, 그 내용을 얼마나 알차고 구성감 있게 '전달'하는데 중심을 두고 있지 않으니까. '글쓰기 플랫폼'인데, 글쓰기는 실종되어 버리고, 이슈와 의제 관심도, 그리고 적절한 유대 관계가 더 큰 작용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틀렸다'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여기는 민간 기업의 사업장이니까.
이러한 화랑과 미술관의 결정적 차이는 역시 목적이다. 미술관은 작품의 판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시의 공간이기 때문. 좋은 작가를 발굴, 조명하고 학예연구 작업을 근간으로 한 전시를 통해 시민을 교육하는 목적도 갖고 있다. 작품을 소장함으로써 그 가치를 후대에 전하는 것도 미술관의 역할이다. 즉 미술관은 콜렉터나 딜러, 큐레이터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세상의 관심을 끌고 있는 만큼 경제적 가치로서의 미술작품을 좀 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가치라고 하지만, 사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 경제적 가치도 높다는 점에서 이는 예술로서 미술작품 본연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저자는 투자의 귀재라는 워런 버핏의 사례를 통해 그것을 설명했다.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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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큐레이팅'이 글쓰기 공간의 메인 스트림이 되었다. 어느 드라마(jtbc '공작 도시')에서 굳이 구별한 '큐레이터'와 '딜러'의 차이점을 무시하더라도, 무언가를 큐레이팅하기 위해서는 목적물이 되는 '글', '글쓰기'에 대한 이해와 관심, 애정이 있어야 한다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큐레이터(curator)는 라틴어 '큐라(cura)'가 어원이고, 이 어원은 다른 영어단어 '캐어 care'가 된다. 즉, '보살피다.', '관리하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용어로 감독인, 관리인을 뜻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등의 관리자라는 뜻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큐레이터는 박물관, 전시관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도 차용하고 있는데, 단순히 작품을 콜렉팅 하여 보관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전시 콘텐츠 기획, 교육 프로그램 개발, 전시자료 조사 및 수집, 전시설계 및 공사 관리, 감독, 그리고 작가와의 관계 관리까지, 기획사의 총괄 프로듀서, 광고 회사의 AE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원래는 상업적인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어서, 거래를 도모하는 상업 갤러리나 기획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딜러, 갤러리스트로 구별하여 부르는 보수적인 견해도 있다. 갤러리, 화랑에는 원칙적으로는 '큐레이터'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슈, 트렌드 큐레이팅'을 지향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큐레이션은 아직 설익어 있다. 그저 클리핑, 콜렉팅 정도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작명이 운명을 이끌어 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 세심하고 심도 있는 현안과 사회의 문제, 이슈에 가려진 가치 있는 이야기의 발굴, 색다른 시선과 다양함의 추구는 큐레이션의 다양한 가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쫓아가던 글쓰기 플랫폼은 기성 미디어의 흉내, 뻔한 이슈와 의제, 그럴 수밖에 없는 인적 구성과 한계, 그리고 자본의 투입이라는 제약으로 방향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표류를 스스로 자초하지 않았나 깊이 반성해 보기도 한다.
글쓰기를 새로이 하고 싶다. 이슈와 트렌드를 큐레이션 할 역량과 경험과 기반이 내게는 없다. 대신 세상의 고민에 대해, 삶의 이면에 대해, 일상의 버거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쓸 수는 있을 것 같다. 나의 이야기로 시작한 생각들이 세상의 고민의 한 구석에 맞닿을 수 있는 '스토리 텔러'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지식인 놀음으로 쌓아둔 '정보'와 '지식'에 대하여 되도록 많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을 하는 '도슨트'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글을 쓴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사라질 기억을 잊히지 않을 보장의 장치가 되기도 하고, 2차원, 2D의 낡은 세상에 디지털, 4D의 세상을 그려 내면서 현재의 신기술을 충분히 담아낼 설명서가 되기도 한다. 영화 <데드풀>의 대사처럼, 일상은 늘 '괴로운 연속극'이지만, 기억되고 기록되는 행복의 찰나는 '화려한 광고'처럼 강렬하게 남고, 그 힘으로 다시 지루한 본편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 외적 보상이야 줄어들고, 운영의 방향과 맞지 않아 다른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 플랫폼에서 '글쓰기'가 존중받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겠지. 다시 즐거움이 되는 글쓰기를 희망하고 실행하려 한다. 다들 행복하고 즐거운 글쓰기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