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글짓기
흔히 글을 쓰고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퇴고’와 ‘탈고’라는 말을 쓴다. 모두 계획하였던 원고를 마무리 작업까지 마쳤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글을 쓰는 행위를 흔히 ‘짓는다’라고 표현한다. ‘글짓기’라는 말을 ‘글쓰기’보다 자주 쓰던 시대가 있었다. 글을 잘 지어서 무언가 형태를 이루는 일을 퇴고라고 말한다. 어느 글쓰기 안내 콘텐츠에서는 퇴고와 탈고가 같은 의미라는 설명도 있었다. 그러나 말뜻을 살펴본다면, 조금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탈고’라는 말은 볏짚(稿)을 다 털어 버린다(脫)는 의미가 있다. 고(稿)라는 한자는 ‘볏짚’ 혹은 ‘원고’의 의미가 있는데, 원고 중에서 특히 초안을 의미하는 한자다. 즉, 초안이 된 볏짚을 털고 진짜 알맹이를 얻는 결과를 말한다.
‘퇴고’는 한자의 뜻으로 그 의미를 가늠하기 어렵다. 밀고(推) 두드린다(敲)는 의미의 한자를 억지 꿰맞추어 말뜻을 모을 수는 있겠지만, 고사성어들이 그러하듯이 고사를 이해해야 그 진짜 말뜻에 다가설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퇴고라는 말이 그것에 해당한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를 고사를 거들어 본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한유(768~824)라는 이가 있었다. 그 한유가 장안의 경조윤이란 벼슬을 지낼 때의 일이다. 가도(779~843)라는 시인이 장안 거리를 거닐면서 서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한참 시 짓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았다.
閑居隣竝少 한거린병소
草徑入荒園 초경입황원
鳥宿池邊樹 조숙지변수
僧敲月下門 승고월하문
한가로이 머무는데 이웃도 없으니
풀숲 오솔길은 적막한 정원으로 드는구나.
새는 연못가 나무 위에서 잠들고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그런데 가도는 마지막 4행의 한 글자가 마음에 쓰였다.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敲)’가 나은지 ‘문을 미네(推)’가 나은지 도무지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기에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비켜라! 경조윤께서 나가신다.”
가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유명한 시인이자 관리인 한유였다. 수행원들이 가도를 붙들어 한유 앞에 세웠다. 가도가 자신이 길을 막아서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한유는 그를 나무라기나 벌하기는커녕 다음과 같이 한시에 조언을 건넸다.
“내 생각에는 ‘두드리네’가 좋을 듯하군.”
그리곤 한참이나 시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미담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퇴고(推敲)’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퇴고[推敲] - 고사성어랑 일촌 맺기, 2010. 9. 15., 기획집단 MOIM, 신동민)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이 말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했는지, 아널드 사무엘슨이 했는지, 버나드 맬러머드가 했는지, 아니면 출처가 불분명한지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있었다. 돌고 돌아 결국 헤밍웨이가 한 말을 아널드 사무엘슨이 받아 적었다는 것으로 정리되긴 했지만. 헤밍웨이의 <작가 수첩>을 보면 그도 한 번에 휘리릭 글을 적어낸 초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 기계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있다. 헤밍웨이는 이를 낙담하지 말라고 한다. ‘퇴고’야 말로 기계적인 임무와 통찰의 수행이 복합된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노동이다. 헤밍웨이도 <무기여 잘 있거라>의 처음을 50번 넘게 고쳐 썼다고 한다. 초고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철저하게 손을 보아서 거듭하여 고쳐 써야 한다. 하지만 작업 요령을 터득하고 난 후, 즉 퇴고의 과정이 손에 익고 몸에 배게 되면 신묘한 일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글쓴이는 초고를 쓰고 나서 흥분하기 마련이다. ‘내가 이런 것을 썼어!’ 하면서 ‘유레카’를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초고는 똥이다. 퇴고의 목표는 읽어 본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경험에 동화되어 실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 과정은 참 고단하다.
버나드 맬러머드도 <말하는 말(馬): 버나드 맬러머드의 삶과 작품(Talking Horse: Bernard Malamud on Life and Work)>이라는 제목의 모음집을 출간하면서 퇴고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초고를 쓰게 되면 고치게 된다. 고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떤 것은 단번에 영감으로 떠오르지만 막힐 때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고쳐 쓰는 것은 새로움을 향한 재창조의 작업이다. 끊임없는 재고에 의한 산출물이다. 그러다 보면 누구나 자기의 생각을 글로 끌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우게 된다. 천재가 아니라면 똥 같은 초고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글쓰기를 예전에는 ‘글짓기’라고 말했다. 요즘은 글짓기라는 말은 어린아이들의 숙제 같은 느낌이 드나 본데, 사실 글은 ‘짓는 것’이 맞다. 글짓기를 집 짓기와 비교하여 보면 흥미롭다. 첫 단계에 대한 생각이 좋은 글을 판가름할지도 모른다. ‘설계’가 되는 부분은 ‘구상’으로 대신해지기도 하지만, 사실 집은 설계를 하고 모형을 만든 후 실제 시공에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기준에서 초고는 어느 단계에 해당이 될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모형’의 단계라고 생각한다. 전체의 모습을 확인하고 실제 공사를 위해 보완하고 준비하는 단계다. 흔히 초고를 집의 뼈대인 기초공사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여 퇴고를 그저 미장일이나 인테리어, 조경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생각으로 좋은 글을 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떤 초고도 모두 쓰레기통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최근 수일 동안 ‘퇴고 작업’을 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부끄러운 고백을 먼저 하자면, 첫 책은 건방지게 초고 수준의 원고를 에디터에게 던져서 알아서 고치라고 했었다. 한 달이 넘게 걸려 문장이 다듬어지고 사실관계가 확인되고 오탈자와 비문이 수정되었다. 그때는 ‘퇴고의 괴로움’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은 진짜 퇴고를 진행했다. 단지 오탈자 문법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었다. 비문과 문장을 다듬는 것은 아주 부차적이었다. 오히려 글을 한 자씩 다시 읽어 내면서 글을 통째로 다시 쓰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이번의 글들은 그간 힘든 시간 속에서 적어 내린 것들이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서, 이동하는 지하철에 기대어 서서,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서 적어낸 글들이다. 거기에 더해 모두가 핸드폰의 작은 자판과 깨진 액정 위에서 적어 내린 글들은 정말 ‘똥’들이었다.
나의 글을 스스로 헐뜯는 말이 아니다. 내 생각과 나의 마음은 내가 보아도 번뜩임과 울림이 있었다. 다만 그 생각과 말을 글로 옮겨 담지 못했다. 그 일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일이 퇴고의 과정이었다. 다행히 엄격하고 꼼꼼한 멘토 작가님의 뼈아픈 지적으로 그 과정의 소중함을 새삼 알아 가는 중이다. 맞춤법 검사를 위해 작은 액정에서 ‘부산대학교 맞춤법 검사기’를 찾고, 사이트가 막혀 있길래 우회 백도어 주소를 알아내어 맞춤법과 문법을 교정했다. 그리고 한글 문서로 변환하여 다시 구성을 보고, PC방으로 향해 12시간 내리 1분도 쉬지 않고 마지막 퇴고 과정을 진행했다.
우선 글쓰기 습관이 잘못된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된다.’, ‘~것이다.’, ‘~해준다.’ 같이 일본식 표현과 컨설턴트 시 제안서와 보고서에 적었던 모호한 표현 일색이었다. 문장의 절반이 이런 표현들이었다. 어미를 고치니 앞단의 어절이 바뀌고 어절을 수정하니 단어와 어휘를 교체해야 했다. 솔직히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에 고마운 시간이었다.
겨우 검토를 거듭하여 주말 출판사 작업을 위해 1차 퇴고한 원고를 멘토이자 총괄 에디터인 선생님께 보내 드렸다. 집에 돌아와 누운 지 2시간도 안 되어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원고를 위한 파일과 문단 쓰기에 대한 지도가 진행되었고, 검토한다고 한 것들에서 이중부호와 오탈자가 또 발견되었다. 부끄럽고 스스로 짜증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다음의 문제는 ‘선택’의 논쟁이었다. 외래어를 쓰는 문제, 유행어의 표기에 대한 입장, 그리고 최근 띄어쓰기와 합성어에 대한 서로의 의견들이 치열하게 교환되었다. 한 갑자를 넘어 연장자이신 선생님과 쉰이 넘은 나 사이에도 시간의 폭이 있었고 생각의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독자들의 거리와 폭은 얼마나 넓은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마지막 퇴고 검토를 건방지게 선생님께 미루고 아내와 오래간만에 햄버거를 먹었다. 고마운 분이 매주 포인트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신다. 그 덕에 4,000원이나 할인해 주는 배달 앱에서 햄버거를 받아서 들어 맛나게 먹었다. 그사이 고마운 선배가 오래된 노트북을 보내 주었다. 1.5kg은 족히 되어 보이는 육중한 노트북이지만, 깨끗하게 닦아 내가 필요한 오피스와 한글 프로그램을 새로 설치해서 보내 주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오래간만에 작은 방구석에서 쓰는 타건의 소리가 참 좋은 날이다. 방금 멘토 선생님이 ‘내용 요약’에 대한 지침을 주어 집중해서 써 내려보내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한 때 열심이었던 글쓰기 플랫폼이 생각났다.
그 짧은 여러 날 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메인의 인기 많은 글들은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인데, 내 홈에 있는 글벗들의 일상은 오늘도 제각각이다. 맘 상해 떠나간 분의 브런치 글을 찾아 마음을 건네고, 지나간 글벗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오늘은 무엇을 쓸까?’ 생각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새로운 생각에 대한 기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지난 3일간의 ‘퇴고 투쟁’을 적었다. 이 글은 퇴고해야겠다. 적어도 세 번은 말이다. 그리고 지난주에도 쉬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써야겠다. 아니 글을 맛있게 지어 보아야겠다. 집고 짓고, 밥도 지으며, 옷도 짓는다. 우리는 글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