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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15. 2023

어쩌면 공들인 위로보다 어설픈 응원이 필요해

[웨이브 오리지널] 박하경 여행기

가끔은 뜬금없는 응원이 필요할 때가 있다. 힘겹다는 말이 한참 모자랄 정도로 비루한 날이 그런 때다. 누군가 힘겨워할 때 보내는 마음의 작용은 보통 '위로'다. 그 위로라는 것이 주는 어감에 가려 실제 작용하는 실효와 적합의 부조리는 쉽게 양해가 되고 만다. 위로는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훨씬 많이 얻어 가곤 한다. 어쩌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위로는 곤란한 처지를 가엽게 여기는 긍휼한 마음, 측은지심이다. 처지에 대한 공감으로 그 곤란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다독이는 마음이다. 곤경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어루만짐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런 이유에서 위로는 주는 자의 뿌듯함이 일어난다. 받는 사람은 일종의 안도를 받을 수는 있으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기에는 온갖 의지의 껑충거림도 모자라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에서 극도로 곤란한 이에게 위로는 어쩌면 무용지물일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비관적인 생각이라 지적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극도로 곤궁한 수렁에 빠진 자의 시니컬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말이다.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건너는 이들에게 필요한 다독임은 위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응원'이다. 위로와 응원의 거죽은 새삼 닮았다. 그러나 그 속살은 사뭇 다르다. 마치 희생과 헌신의 모습처럼 말이다. 희생은 고고한 숭고함 뒤의 대가의 포기라는 어마어마한 결심이 있지만, 사실 헌신이라는 것은 언제나 손해 득실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작든 크든 말이다.

위로가 아닌 응원이 필요해 (출처=노컷뉴스)



여행이 잘 안보이는 여행기


OTT 웨이브에서 스트리밍하기 시작한 <박하경 여행기>를 보았다. 이런저런 부침으로 글을 잠시 접고 나니, 영화나 드라마 콘텐츠를 보는 것도 주저하고 미루게 된 지 수 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텅 빈 주머니에 하루 한 끼도 힘든 날들 속에서 극장 개봉작을 볼 여유나 여력 따위는 없고, 통신 약정 시 개설된 OTT의 콘텐츠는 그저 나중을 기약하기 일쑤였다. 글로 적어 낼 것 없으니 그저 백색소음처럼 콘텐츠를 소비하고, 자극적이고 휘발적인 탐사보도나 범죄 스토리나 찾아들고 있었다. 이런 마음에 '힐링'이나 '잔잔한 여운'은 오히려 베인 상처의 소금처럼 따가울 뿐이었다. 그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박하경 여행기>라는 심심한 콘텐츠를 만났다.

공식 포스터 (출처=LAMP, Wavve)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박하경(이나영)은 나름 안정적인 일상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삶이 그다지 행복하다든지 뿌듯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한때 유망직종이었던 교사가 이제는 기피 직업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교과목도 국어라니. 하루하루가 교실 앞 시간표에 적힌 일상처럼 틀에 박혀 있고 그 박혀 버린 틀 속에서 생활이 아닌 생존에 만족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 일상의 고루함을 벗어나기 위한 궁여지책이 ‘여행’이다. 훌륭한 계획과 엄청난 포부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한 여행길은 심심하기 끝이 없다. 서울에서 땅끝마을 템플스테이를 당일치기로 올만큼 무언가 큰바람이 있는 걸음도 아닌 듯싶다. 그저 ‘떠난다’라는 여행의 일차적인 목적에 충실한 여행이다.


각 회차의 에피소드가 박하경이 떠난 여행에서 마주한 이야기들로 이어진다. 말이 여행기이지, 이야기는 여행기라고 느껴질 요소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저 장소가 해남이고 군산, 부산이며 속초라는 정도가 ‘여행길이구나!'하는 설정을 거들어 줄 뿐이다. 홍보하는 티저에는 여행과 먹거리를 통해 삶을 통찰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잔뜩 품어 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성장담의 로드무비와는 무척 다르고 그렇다고 일본의 장수 콘텐츠<고독한 미식가>처럼 먹을거리에 대한 조망도 여간 성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제목이 ‘여행기’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서 겪는 아주 심심한 일들의 기록일 뿐이다. 여기에서 일단 팔짱을 한 번 끼게 된다. 4회차까지 캐스팅한 배우들의 면면은 혹하기 마련인데, 이야기가 어설프다. 비루한 일상을 관조하는 홍상수의 꼬이고 꼬인 일상론을 더듬어 만져 내는 듯하기도 하고, 전형적인 저예산 영화의 돌발 개연히 개입하는 것을 보고 다리고 한 번 꼬아 앉는다. 아내의 추천으로 보게 된 이야기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돌이표처럼 순회하는 우연과 필연의 뫼비우스 같은 홍상수식 일상의 무게는 그저 흉내일 뿐이었다. 무게감을 느끼기도 전에 휘발해 버리는 이야기가 모호했다. 해남 템플스테이에서 마주한 스님의 차담에서 등장하는 싱거운 낯섦은 그냥 뻔한 한 수였다. 군산에서 만난 옛 제자(한예리)의 행위 예술은 이젠 생경한 것을 한참 지나 독립영화의 클리셰가 되어 있었다. 부산영화제에서 조우한 이창진(구교환)과 마주한 <달 세계 여행>의 트레일은 원본도 아니라니. 그토록 뒤에서 조리돌리는 홍상수를 닮고 싶어 미친 것이 아닌가 싶어 심기가 불편했다. 그래도 인내를 가지고 집중하기로 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긴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25분 남짓의 콘텐츠를 보며 다른 생각들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속초 터미널에서 마주한 꼰대 영감(박인환)과의 논쟁에서부터였다. 뻔한 세대 간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불통과 오해, 마침내 서로 무시하는 일들이 뻔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마무리가 관성적이지만 신선했다. 전형적인 맺음말이 때로는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듯이 말이다. 그 식상한 맺음은 위로도 위안도 힐링도 아닌 ‘응원’이었다.

여행이라 쓰고 응원이라 읽는다 (출처=LAMP, Wavve)



어쩌면 우리는 응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박하경은 여행길에서 사람을 만난다. 템플스테이에서는 아는 사람만 알 법한 소설가와 묵언 수행자(선우정아)를 원치 않게 만나고, 군산은 옛 제자의 전시회를 축하하기 위해 내디딘 걸음에 이런저런 사람들과 마주친다. 그리고 부산에서는 군산의 타로에서 예지한 ‘Lovers' 카드가 눈에 현시한 듯이 한 창진을 우연히도 만난다. 그리고, 속초 터미널에서는 나라 걱정 없는 젊은것들을 한창 욕하는 영감과 어쩔 수 없이 공간을 함께 한다. ‘만난다‘라는 말속에는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시간의 조우와 공간의 공유가 있기 마련이다. 약속을 잡아 만나는 만남도 있겠지만 우연히 마주하는 일도 다반사이고 함께 하고 싶지 않아도 머물러야 하는 현실이 있다. 그 모두가 ’만남‘이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의 만남의 광장이나 공항 입국장의 설렘 가득한 만남도 있겠지만, 사실 일상에서의 만남은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일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하경이 여행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 여행길에서 의미를 둘 만남을 얼마나 마주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빈번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여행은 언제나 떠나는 사람의 의지와 용기의 문제이듯, 살아간다는 것도 살아 내는 사람의 무단한 노력의 문제다. 삶을 계속한다는 것은 돈이나 명예, 성공이나 실패의 문제가 아닌 언제나 용기와 의지의 영역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박하경의 여행은 그 삶을 대변한다. 다만 박하경의 여행길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여행에 늘 ‘응원’이 있기 때문이다.


박하경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그의 의지이든 우연의 일치이든 상관없이 아주 작은 응원이 끼어든다. 묵언 수행자의 한마디를 틔워 준 것이 일몰을 함께한 박하경의 존재일지 아니면 그 시간이 되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알 수 없는 암묵지의 응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공간에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가스를 배출하는 일도 누군가의 존재가 응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군산의 제자는 어떠한가. 되지도 않는 예술을 한다는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딱 한 사람만 지켜보아 주고 지지한다는 느낌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터미널에서 만난 영감과 헤어지는 길 위에서 그 연배의 아버지를 떠 올리며 건네는 미안함과 죄송함의 인사는 뻔하지만, 그 뻔한 것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서 오히려 역설적인 응원이 되었다. 옳고 그름, 다름과 차별, 그리고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닌,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지지하는 마음이 응원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늘 용기의 문제다 (출처=LAMP, Wavve)


이런 여행길에서 박하경은 스스로 치유자인 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자기도 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 존재로서 누군가에게 응원이 되고, 어떤 이로부터는 응원받는다. 영화제부터 자꾸 마주하는 창진이 건넨 귤 한 봉지는 분명 응원의 마음이다. 여기에서 ‘위로’와 ‘응원’의 구분이 필요하다. 위로는 공감하는 자의 것이다. 위로를 건네지만 결국 그 위로의 반향은 건네는 사람에게 더 짙게 남는다. 받는 사람은 그 한순간 잠시 따뜻함을 느꼈을지는 모르지만, 그 위로로 인해 꺾인 무릎을 디디고 일어날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극도로 곤궁한 사람들은 그렇다. 그러나 묘하게도 응원은 다르다. 응원은 처한 사람의 것이 된다. 극한 곤란의 수렁에 빠진 사람이 가진 힘을 다해 개미지옥 밖으로 빠져나올 각성을 준다. 응원이란 그 처한 사람을 조건 없이 지지하는 일이다. 조건이 없는 이유는 그 처한 사람의 상황과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나 ‘왜’라는 마음은 위로의 마음이다. 그것은 위로를 주는 사람의 물음에 대한 질문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래서 ’와 ‘어떻게’가 동반된 응원은 그 위로와 매우 다르다. 완벽하게 처한 사람의 희망을 불러일으킬 순 없어도 한 걸음 내디딜 용기를 준다. 이런 이유로 응원은 힘겨운 사람들에게 늘 유효하다. 희망을 잡아 내기 위해 힘내고자 하는 용기의 방향에 함께 정렬하는 마음이 응원이기 때문이다. 그 응원에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딱하게 되었는지는 소멸하고 없다. 그저 이제 어떻게 일어 날 것인지,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촘촘한 물음이다.



여행기가 아닌 응원기로 보는 이야기


드라마<박하경 여행기>는 재미있는 콘텐츠는 아니다. 사건과 사고가 없는 이야기에는 주의력 결핍이 되는 이 시대에서 외면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는 <리틀 포레스트>그것처럼 일상의 미묘함이 특별함으로 포장될 만큼 상세한 묘사도 없다. 하물며 심심한 일상에 냉소적인 관찰도 없다. 일견 콘텐츠의 진행과 알맹이, 그리고 연출에 아쉬움이 곁들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 ‘멋들어짐’을 추구했다면 이 이야기에서 절대 ‘응원’은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누구의 잘못이든 오해이든 차이든 간에, 어떤 무리든 구조적인 폭력은 늘 존재한다는 것을 매일 깨닫고 있다. 가난함이 준 내 이력의 딱지다. 숨어 있던 파리들이 이때다 싶어 웽 웽하듯, 잠깐 의지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득달같이 몰려들어 물어뜯는 것이 요즘의 생존방식이라는 데에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투명한 존재가 되거나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게 지내는 것이 현명한 처세가 되어 버렸다. 캐나다의 사회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의 ‘얼룩말 이야기’에서 잘 설명되듯이, ‘특별함’을 감추고 식별 불가능할 만큼의 그놈이 그놈 같은 착시를 주는 줄무늬가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던 피터슨의 '얼룩말 이야기')

https://youtu.be/ga-mLOJCh5s)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에 현시욕같이 특별한 존재가 되고픈 욕망은 원초적일 텐데, 오히려 군중 가운데 섞여 식별 불가능한 one of them이 되길 원하는 세상 양태는 다소 이율배반적이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사실이자 진실이다. 진리가 될 수는 없어도 말이다. 최근 SNS에서도 이 세대와 저 세대, 이 부류와 저 부류의 가운데에 적절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마치 어른의 자세인 양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솔직히 못마땅하다. 이는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서 싫고 그를 비판하는 것은 PC(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된 일종의 폭거라는 이야기에 동조하는 사람과 동일하다. 차별과 차이가 다른 것이라 강조하며 그 차이를 인지하는 세대를 인정하라고 하지만, 차별은 그 차이를 강조하여 서로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현실은 전혀 직시하지 못하는 코끼리 궁둥이 만지기식의 담론일 뿐이다.


더 나아가 옳고 그름과 선과 악, 정의와 부조리에 대한 판단을 중단하라는 것이 마치 ‘쿨한 어른’인 것처럼 전달되는 말이 참 거북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누구에게나 판단의 다름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한 지적과 판단을 중단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쪽과 저쪽에서 욕을 먹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분명 잘 포장된 썩은 생선 같은 궤변일 뿐이다. 사실의 총합은 진실은 아니고, 진실의 집합이 진리가 될 수 없다. 그저 사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관조는 법정에서 법 기술자들이나 하는 협상의 기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니까.


심해의 대구 때처럼 아니면 세렝게티의 얼룩말처럼 식별하기 어려운 투명 인간이 늘어 간다면 세상에서 응원도 사라질 것이다. 보편적이며 범용적인 감정을 공유하기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특별하게 튀는 처사도 아니다. 그래서 위로는 생각보다 이 시대에서 그럴듯한 나로서 자위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응원은 용기가 필요하다. 궁지에 처한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고, 이해되었다면 뒤돌아보는 일보다 앞으로 나가는 방향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것으로 세상의 눈총과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당사자가 아닌 타인들의 품평과 각자의 판단 속에 사실과 진실은 뒤섞여 버리고 결국 진리의 문턱까지 가는 길은 계속 멀어지는데도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엉덩이에 페인트 표식을 한 얼룩말은 그 건강과 능력에 상관없이 사자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되듯, 특별한 누군가로 여기어지는 순간, 이 세상에서 좌표가 찍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응원이 필요하다면 보라 (출처=LAMP. Wavve)


아직은 응원이 필요한 요즘이다. 그러나 그 진심 어린 응원은 좀처럼 다가서지 않는다. 오히려 불현듯 마주하는 일상에서 스쳐 가는 생면부지의 타인들의 작은 도움이 큰 힘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박하경 여행기>는 엄청난 깨달음이나 윤슬만 가득한 평온의 힐링을 느끼기엔 부족하다. 그것을 의도하고 만들었다면 실패작이다. 그러나 그저 어설프고 작은 응원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움찔거리게 될 것이다. 때로는 공들인 위로보다 어설픈 응원이 진짜 힘이 되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들을 우리는 ‘일상’이라 하고 그 일상을 살아 내는 일을 ‘생활’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응원이 어설프게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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