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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Jun 15. 2024

어제의 그들이 오늘의 내가-그들도 우리처럼 (1990)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

80년대의 탄광촌에 서울말을 쓰는 청년이 일자리를 구하러 다닌다. 어느 연탄 공장의 숙직실에 기기하며 탄광촌에 자리 잡는다. 이름이 기영(문성근)이라는데 사실인데 알 바도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다. 탄광은 늘 구인난이었으니까. 지역 형사도 의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본다. 잦은 파업과 인구 이탈로 일손 하나 부족한 지역의 원성에 일단 넘어간다.

포스터 (사진=KMDb)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온통 새까만 이곳에서 특별한 일이라고는 갱도 광부들의 파업뿐이다. 사업주가 부동산 투기로 말려 먹은 것으로 인해 탄광은 폐광 직전이다. 이들의 생존권에 대한 몸부림은 어느 누구 하나 편들지 못한다. 그렇다고 손가락질하며 욕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우리이고, 우리가 그들이 되는 그저 모두가 새까맣게 되어 버린 세상이니까.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은 1980년 '사북항쟁'으로 불리는 강원도 사북 동원탄광 파업과 폐광을 배경으로 한다. 딱 그 시점의 시기를 특정하지 않아도, 굳이 시대 고찰의 로케이션이나 무대장치를 하지 않아도 10년 뒤에 만든 영화는 이질감이 없었다. 1980년의 사북이나 1990년의 사북이나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새까맣게 가난한 동네. 그 모습이 화석처럼 굳어져 있었다.

사북 항쟁 (사진=동아일보)

석탄은 한동안 대한민국의 효자였다. 수출도 하고 기나긴 겨울밤을 덥혀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온몸을 불살라 다 태워버리고 허옇게 남은 잿더미마저도 미끄러운 골목을 지켜주는 조용한 파수꾼이 되었다. 광부의 엄청난 노동 생산성은 해외에도 알려져 독일에 파견되어 외화벌이의 역군도 되었다. 그러던 석탄이 석유의 등장으로 그 갈 길을 잃어버리고, 탄광과 광부는 역사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영화에서 사건이라고 할 것이 대단하게 조명되지는 않았다. 파업이라는 암시와 도망자 기영이 수배 중인 시국사범이라는 교차편집만 던져 주었다. 당시의 엄중하고 무거운 세상의 공기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온통 까만 사북은 80년대의 서민의 가슴속 마냥 침울하였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을 '오늘'이라고 정의했던가. 그들의 절망은 우리의 희망이 되고, 그들의 희망이 우리에겐 절망이 되는 그런 날들의 생생한 흑백사진.

스틸컷 (사진=KMDb)

영화의 영화 제목이 "Black Republic"이다. 나중에 붙인 것인지 몰라도, 영화의 메시지를 잘 여미어 놓았다. 온통 까만 작은 탄광촌은 이 세상 부조리의 축소판이었으니까. 영화를 감독한 박광수 감독은 당시 문제적 감독이었다. 연극으로 유명한 <칠수와 만수>등 영화로 세상을 이야기했다. 아주 현실적이고 핍진적인 시대의 스케치는 누군가에겐 불손하였고 어떤 이에겐 뭉클거렸다. 1980, 90년대란 그런 시기였다. 딱히 어제와 내일을 이야기할 필요 없이 오늘을 보여 주면 영화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 세상이었다.


강원도 사북은 지금 태백으로 바뀐 황지를 중심으로 하는 탄광촌 중 하나였다. 예전 황지를 가기 위해서는 기차가 앞뒤로 지그 재그 견인하여 산을 타고 오르는 기차를 타야 했다. 영동선, 태백선, 철암선은 사람보다 석탄을 더 실어 나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골 어딘가 산 능선부터 펼쳐진 탄 적하장과 배추밭의 흑, 청 조합은 아직도 잊기 힘든 풍경이다.


방학만 되면 입하나 손하나 줄이기 위해 간이역마다 서는 기차에 7살 꼬마를 처가 강원도 산골로 태워 보낸 모친이었다. 8시간이 넘는 태백선 황지 역엔 군청 공무원 외삼촌이 부업으로 끌던 택시를 몰고 나를 맞이하곤 하였다. 그때의 황지나 지금의 태백이나 크게 바뀌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은 그저 건성 되는 관찰일까. 일 년 내내 서늘한 그곳의 공기가 가끔 그리워진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사진=한국역사문화신문)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32년이 넘는 시대의 모습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그때에도 가장 가난한 마을 탄광촌의 모습이 익숙했다. 늙은 것이다. 언제까지 청년이라 생각하던 내 착각이 깨져 버렸다. 창백한 퇴폐적 청년 문성근은 표독한 중년 연기 전문이 되었고, 그 새까만 동네에서도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심혜진은 일일드라마의 사모님이 되었다.


영화 제목의 그들과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자문자답해 본다. 해마다 자리를 바꾼다. 이것도 세월이고 변화라고 하는 것일까. 어제는 그들이 불쌍했고, 오늘은 내가  처연하니 말이다.  스스로 무엇이라 규정하든 간에 시간은 흐르고,  시간의 중력은 어쩔  없이 변화를 낳게 된다. 찬란한 시간은 없었어도 누구나 꿈꾸던 날들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를  있을까. 사라져  것들에 대한 묵념을 거두고 내일을 보고 싶다. 나이 쉰하고 둘에도 그렇다.


우리가 오늘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은
오늘의 어둠에 절망하지만
보다 찬란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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