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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Jul 06. 2024

나의 해방일지(2022): 일상에 대한 추앙

누구나 해방을 꿈꾼다

1.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중 야구 중계, 영화 보기와 함께 비중이 높은 것이 드라마 시청이 아닐까 싶다. 두 해 전에도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와 함께 본방 사수 중이었던 <나의 해방일지>에 주말 밤 시간을 고스란히 내어 주었다. 아마도 우리에겐 무겁고 버거운 일상의 고단함 속에 잠시 인생이라는 과대망상을 허락해 주는 시간이 아닐까 싶었다. 이 또한 일종의 '해방'이 아닐까 생각하며 드라마의 주제이자 제목인 '해방'을 생각해 본다.

각자의 나름의 해방


2.

'해방'이라는 단어는 솔직히 "옛날 말"로 여기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제법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말이다. '해방 때'라는 회고적 이야기를 함께 살던 조부모에게로부터 제법 듣고 자랐다. 그러나 요즘의 일상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 되었다. '무언가의 억압, 구속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의미를 지닌 말은 우선 일제 강점기로부터의 '해방'을 떠올릴 수 있으나,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광복'과 '건국'으로 대신한 지 오래되었으니까. '해방절'은 북한과 중국이 여전히 사용하기에 '폭압적인 자본으로부터의 해방', 곧 '공산화'를 연상시킨다는 억지 이유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아직도 유효하다.

모두의, 나름의 해방 욕구

3.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나'는 경기도 당미시 산포에 살고 있는 염재호 씨와 그의 삼 남매, 그중의 막내인 '미정'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해방이라는 뜻의 영단어 liberate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뜻도 함의하기에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이 드라마의 해방은 '부모'라는 가족의 굴레로부터의 자유로움이라는 이야기도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드는 생각은, 화자와 관점은 막내 미정의 시선에서 이루고 있지만, 결국 미정과 관계도를 이루는 등장인물들의 각자 '나름의 해방 이야기'가 내러티브를 이룬다고 생각이 들었다.


4.

우선 '관계'로부터의 해방이 있다. 바로 아버지 염재호가 그 대표적이다. 드라마의 구성에서 주변 인물일 수도 있겠으나, 염 씨 삼 남매를 비롯한 인물들의 해방 욕구는 모두 이 대사 거의 없는 무뚝뚝한 가장, 아버지로부터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출생과 존재의 이유가 되는 아버지의 존재는 대사량이 보여 주 듯, 염씨네 집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도 거죽만 무거운 휘청대는 허수아비다. 그 존재를 억지 인정하던 아내의 죽음으로 아이러니하게 해방은 가족들에게 다가온다. 삼 남매는 시골 같지 않은 시골 산포에서 서울로의 고된 통근길에서 해방되고, 휴일이면 밭일에 불려 나갈 가족 노동에서 해방되고, 어머니는 죽음으로 비로소 그 막중한 가계의 모든 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아버지 염재호도 해방된다. 서로가 '관계'로 얽매였던 모든 '책임'으로부터의 해방 말이다. 관계는 나를 구속하는 가장 큰 굴레가 되곤 한다. 특히 가족은.

아버지도 해방하고 싶다


5.

다음은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이 있다. 드라마의 군상과 인물의 삶엔 거창함 따위란 없다. 무거운 아침에 달걀 프라이 하나 구겨 넣을 기력은 기상과 함께 전멸이다. 출근부터 진 빠지는 일과에 퇴근길은 설레는 귀가와 휴식이 아니라 긴 여정의 고단함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염씨네 주위에서 거대한 '욕망'을 찾아보기는 참 힘들다. 아들 창희의 '롤스로이스' 구애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누구나 욕구를 채우고 살고자 버둥거린다. 바라는 것을 이루거나 집어 들고 싶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게 원래 그런 존재니까. 그런데, 안 그런 척하면서부터 사달이 난다. 병이 든 것처럼 앓고 만다.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욕구와 소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드러냄에 있을지도 모른다. 일확천금, 승진, 정규직 전환, 신분의 상승, 연애와 결혼, 그리고 이 뭣 같은 세상과의 바이 바이.


6.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 남는다. '나 자신'은 다름 아닌 '그럴듯해 보이고 싶은 나'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처음엔 타인에게 인정받고 지기 싫고 괜찮아 보이고자 하는 바람들이 가득 차 오른다. 그러다가 자신을 기만한다. 궁극적으로 진정 바라거나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난데없이 버킷리스트에 올라있는 번지점프처럼, 그럴싸 해 보이는 '나'이고 싶은 것이 인간이니까. 정규직과 계약직의 신분이, 이혼남을 좋아하는 금사빠의 마음이, 착한 막내로 남고 싶은 속 곪은 일상이 나를 규정하지 않기를 바라며 애쓰며 산다. 딱 한 사람 술에 절어 하루를 보내는 구 씨 말고.

하루에 5분


7.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이런저런 면에서 이상한 드라마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행복보다는 불행이, 번쩍이는 순간보다는 무채색 나른함이 더 용납되곤 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 입에 늘 달고 살았던 인생관과 닮아 있다. 비루하고 참담하며 고단한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평범한 일상이 겨우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은, 하루에 5분도 되지 않을 반짝 거리는 설렘과 행복감의 거대한 과대망상, 바로 인생이라는 놈을 지탱하는 것일 테니까. 미정이 구 씨에게 건넨 이야기처럼 하루의 5분의 행복으로 살아지는 것이 삶이 아닐까? 편의점 문을 대신 잡아 주는 학생에게 7초 설레고, 일요일인 줄 알았는데 토요일 아침이라 5초 설레고, 잘못 걸린 전화에 기다린 소식인가 싶어 3초 설레고, 펼쳐 든 오늘의 운세에 10초 정도 설레는 행복. 그것이 모여 하루에 5분 행복해하는 삶.


8.

드라마는 실상 잘 쓰지도 않는 단어 '추앙'을 꺼내 들어 회자가 되기 시작하였다. 미정이 구 씨에게 자신의 비루한 삶을 추앙하라고 한다. 느닷없는 주문에 사연 많아 보이고, 늘 술에 젖어 있는 남자는 그러겠노라 약속한다. 비범한 인생이 평범한 일상에게 비로소 추앙하는 것. 그것이 삶의 이유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사건보다 이들의 말과 눈빛이 의미 깊게 다가오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삶을 정리하는 순간 휘청대는 사건의 연속보다 남겨둔, 보낸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더 남을지도 모른다 짐짓해 본다. 갑자기 가버린 모친의 유골함이 툭툭 소리 내어 말 걸듯.

추앙...

9.

드라마 마지막 회 방영을 앞두고 내 마음이 해방되었다. 드라마로부터 말이다. 개인적으로 구 씨가 비극을 맞이하든, 미정이 진정한 사랑을 얻든, 창희가 가정을 이루고 또 다른 아버지가 되든, 기정이 드디어 결혼을 이루어 내든 관심이 없어졌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관계가 모두 해체되어 각자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 씨가 알코올 중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예견하며, 서울역에 있든 운이 좋아 일찍 가든지라는 속내를 이야기해도 슬프지 않은 이유다. 그들은 잠시라도 해방 근처에라도 간 것 같기 때문이다. 특히 '나'로부터


10.

인생을 '승부'로 비유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불편하다. 산다는 것은 가위 바위 보 하며 무언가를 계속 얻어 가는 과정의 일련으로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지지 않으려다 실패하는 삶이 남겨질 뿐이겠지. 하루에 5분이라도 오롯이 설레는 일상을 추앙한다. 인생은 승패가 있는 사건의 집합이 아니라, 버겁지만 소중한 일상의 총합일 테니까.

일상을 추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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