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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Feb 24. 2020

싫은 절을 떠날 수 있는 중

     

살아가는 동안, 나는 특정한 이야기들을 몇 차례 들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종류의 이야기들.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을 내가 좀처럼 하지 못해서. 그런 나 때문에 결국 자기 속이 벌어지다 못해 째져 버린 사람들은 애걸하듯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제발 이렇게 좀 하라고. 제발 이러고 좀 살라고. 부탁인데, 제발….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넌 왜 계속 거기 버티고만 있어? 얻어터지면서도. 그게 재밌냐? 하여간 미련해 가지고. 너 거기 있으면 자꾸 다칠 수밖에 없는 거, 너도 알잖아. 알면서 왜 그러는데,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당시 나는 부조리한 절을 떠나지 못하고 주지 스님과 계속 싸우는 중 같았다. 때로는 그 절의 모든 중들과 맞서야 했다. 그 절의 비리를 문제 삼는 것이 나 하나여서. 


이걸 ‘당시’라고 말해서 이것이 먼 과거의 일처럼 문득 느껴지는데, 사실 나는 최근까지 그렇게 살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정의감 때문에 가슴이 홧홧해서 그랬다, 라기보다는…(나에게 정의감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게 가장 두드러진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을 가만 두고 보는 것을 천성적으로 잘하지 못해서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서. 그래서 나는 자주 주제넘었고, 내 오지랖의 넓이를 수시로 확장하였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옳다.’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 견해이며 부실한 주장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때 나는 내가 ‘절대선’의 구역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생각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절대선을 행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생이라는 것의 작은 단면 하나도 겨우 다 볼까, 말까, 하는 주제에, 절대선과 절대악을 논하였다. 


나는 그 이분법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았다(그때 나에겐 절대선과 절대악뿐이었다. 좋은 거 아니면 나쁜 거, 라는 논리 안에서 굴러가는 세계). 그 고통을 제공하는 주체는 언제나 하나였다. 나. 


부처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이용해 제 배를 채우기 바쁜 주지 스님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그게 처음부터 썩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아주 철저하게 썩어 버린 사찰 관행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부정행위에 대한 내 혐오와 분노가 나를 갉아먹을 뿐이었다.


어느 초겨울에 그걸 깨달았다. 강변에서 뛰고 있다가. 나를 무너뜨린 대부분의 고통들이 내 안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그것들 전부 내가 자진해서 얻은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악을 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악의가 없을 수 있는지 

알고 나서 나는 몇 날 밤을 새었던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악행은 악행이 아니다.

선량함, 절대선의 꺼풀을 뒤집어쓴 

악행들이 많다 못해 무수하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도

자부심을 느끼거나 도리어 

억울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바뀌지 않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보겠다고 나는 결심하였다. 아직 골라지지 않은 호흡이 희미한 입김으로 바뀌는 걸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와 맞지 않는 절에서 죽도록 소모되지 말고, 그곳을 제때 떠날 수 있는 중이 되어 보겠다고. 


정의에 대한 추구를 관두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건 다만, 나의 정의를 나의 정의로 두겠다는 거였다. 만고불변의 법칙을 지키라며 이 사람, 저 사람 들볶는 삶이 아니라, 개인적인 기준을 조용히 따르는 삶으로 가겠다는 거였다. 나는 아직 그리로 가고 있다. 끝내 터져 버린 울화통의 잔해를 한 번씩 수습하며.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두고, 그 자리를 이만 떠나는 일. 그 일 앞에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보다 나 스스로를 독려하려면, 나는 자꾸 믿어야 하겠다. 내가 세상 전부를 내 멋대로 바꿀 수 없음을(그래서도 안 됨을). 내 안에 있는 정당함, 조리, 합리는 나만의 정당함, 조리, 합리일 수 있음을. 그리하여 내 눈에 부당해 보이고 부조리해 보이고 불합리해 보이는 것들을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반드시 비겁한 짓은 아님을. 내 기준 앞세워 여러 사람들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비겁한 짓일 수 있음을. 


그리고 자꾸 기억해야 하겠다. 내 정신세계에 화재 사건을 수차례 일으킨 주범은 나 하나였음을. 내 증오와 노여움이 내 영혼의 척추에 불을 질러 왔음을. 생의 외면이 아닌 내면에 불을 놓을 수 있는 건, 언제나 그 자신뿐임을.  





    

이렇게 또 하나의 타협을 하고, 또 조금쯤 물러지며, 또 얼마간은 시시해지며, 나이 들어 간다. 불과 가깝던 나날이 물과 가까워지는 것이, 나는 아직도 놀랍고 반갑다. 




ⓒ 카쿠코 매거진, 박다빈,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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