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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r 12. 2020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


1.


어제는 과거라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였다. 머리가 무거워 늦저녁부터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려던 잠은 안 자고…. 나는 간만에 시간의 막을 들추고 내 과거로 들어갔다. 거기에 제법 오래 머물러 있었다. 한 시간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먼저, 나는 과거에 내가 상처 준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과거에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어떤 회상은 화상처럼 고통스러웠고, 어떤 회상은 내 몸 곳곳을 마비시켰다. 어떤 회상은 꼭 타인의 회고록을 읽는 듯한 느낌을 나에게 안겼다. 지금이라면 내가 절대 하지 않을 말들, 절대 내놓지 않을 반응들을 토하듯이 쏟아 놓고 있는 과거의 나 자신이 너무 낯설어서. ‘내가 저렇게도 살았구나.’ 하면서도, 나는 그것을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였다. 너무 남의 일 같아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내가 10년 동안 나 자신을 업데이트만 한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라는 인간의 성질이랄까, 특성이랄까, 그런 것들의 큰 틀은 바뀌었다. 내 안의 강과 산이 그 모양을 바꾼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생을 통틀어 보면, 두어 번 정도.


나는 내가 보낸 세월만큼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주는 양분을 남김없이 먹고 자란 쪽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경악할 정도로는 달라진 것 같다. 그 경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2.     


나는 보통에도 못 미치는, 모자란 것이 정말 많은 인간이었다(물론 지금도 그런데, 그때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걸어 나가기가 늘 어려웠다. 어쩌면 그게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나는 어딘가에 올곧게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여기저기 한눈을 팔았다. 걸려 넘어지지 않아도 될 곳에서 험하게 넘어져 무릎과 콧등을 가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 남들은 웃고 넘기는 일을 웃고 넘기지 못해, 되지도 않을 싸움을 시작하는 것도 그것만큼 예사로운 일이었다. 패잔병으로 살아가느라, 나는 내 생에서 수많은 계절들을 누락시켰다. 


겸손 떠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어서, 분수에 넘치는 일을 직면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결국 이것저것 망쳐 버리기 일쑤였다. 가벼운 잔꾀는 많은데 지혜는 없었기 때문이다. 


얕은 수만 써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었다. 문제는 그때 나 자신에게 자기 객관화 능력이 전혀 없었단 거다. 나는 내가 잘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살던 대로 계속 살았다. 그러면서 수많은 기회들을 내 손으로 날려 버렸다. 


최선을 다하는데도 일들이 잘 안 되니 미칠 노릇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앞으로 한 발 내디디는 것도 두려웠다. 아무것도 설레지 않았다. 이번엔 뭘 말아먹을까, 하는 생각만 들어서. 


끝내 나는 자기 연민이라는 진통제에 중독되었다. 나는 그 진통제를 시도 때도 없이 복용하였다. 그리하여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정신을 잠재웠다.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속닥거렸다. 너는 할 만큼 했다고. 너 고단한 거 내가 다 안다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나는 누군가가 나를 돌봐 주기만을 원했다. 항상 나쁜 건 세상이고 사람들이었다. 나는 순백하도록 결백하고.







3. 


자기 성찰을 제대로 할 줄 몰라서 자기 개선도 없던 생을 뜯어고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그런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튼 그런 의지가 문득 생겼다. 


어디에서든 핑계 대지 않고, 뭐든 적당히 눙치지 않고, 똑바로 살고 싶었다.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똑바로 서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나 혼자 힘으로 걸어 보고 싶었다. 뭔가를 실패할 때마다 원망할 대상부터 찾는 일도 관두고 싶었다. 나는 내가 총체적인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그 생각이 그간의 내 삶을 내 눈앞에 펼쳐 보였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이거 때문이다, 저거 때문이다, 하며 푸념만 하던 내 생이. 진절머리가 났다. 모르겠다. 생을 전복시키는 그런 진저리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전날까지만 해도 그 생 안에서 잘만 살았는데. 아무튼 그런 진저리를 치다가, 나는 나를 업데이트시키기로 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려 하니, 그런 사람들만 보였다.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려 애쓰며 살고 있었다.

      

최신 업데이트 공지가 떠도, 내가 그 어플을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나는 기존 버전의 어플을 계속 사용하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을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해도,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그 사람을 옛날 버전의 그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어떤 식으로 거듭난 사람 주변에는 그 사람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바뀌냐며. 다 눈속임이라며.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며…. 누군가의 최신 업데이트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최근에 변화를 보인 그 사람의 과거 행적들을 끄집어내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저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라며. 여러분들이 지금 다 속고 있는 거라며…. 


물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대신 가면을 쓴다. 그 편이 여러모로 간편하니까. 근데 누가 진짜 변화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가면만 썼는지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건 그 자신만 아는 문제겠다. 때로는 그 자신도 모른다. 자기가 가면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사람이 된 건지. 가면을 쓰자마자, 자기 자신이 실제로 변했다고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실은 자기 자신이 정말로 변했는데, 아직도 자기가 가면을 쓰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겠다. 잔머리 굴리다가 써 본 어떤 가면이 너무 좋아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게 된 사람들도 있겠다. 


요컨대, 개인의 변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건 누가 관여할 수 있는 일, 관여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짜 변화로 누가 누구에게 고의적인 피해를 입히는 게 아닌 이상….







4.     


누구에게나 벗어나고 싶은 

과거가 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모두의 변화 가능성을.


그 사람이 나를 속인 거라 해도 상관없다. “나 이제 그때 그 사람 아니야.”라는 식의 그 사람 선언을 나는 일단 믿는다. 어떤 과거로부터의 해방은 그 과거에 대한 전면적인 부인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아서. 그 사람 선언의 진위 여부는 내 문제가 아니니, 나는 그 사람 말을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어느 때 나는 그 사람 선언이 조금 미심쩍다고 느낄 수 있다. 그 사람 언행이 불일치할 때. 그런 때도 나는 그 사람 말을 믿어 보려고 한다. 지금 그 사람 말이 거짓말이어도, 결국에는 그 말이 사실이 될 수 있다는 데 판돈 같은 희망을 걸고. 물론, 그 사람이 그 말로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그런 정황이 드러났다면, 나는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기로 한다. 그 사람에게 중요한 건 자기 변화가 아니라 자기 실속이니까.


스스로를 너무 변화시키고 싶지만 아직 그럴 역량이 안 돼서 (또는 그 변화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진행 중이어서) “난 더 이상 그때 그 사람 아니야.”라는 말로나마 스스로를 독려하며 자기가 선택한 길에서 계속 버티는 사람들. 자기 변화라는 목적지를 두고 뒤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절박함은 나를 감동시킨다. 좋은 쪽으로 나를 자극하고. 


그래서 나는 그들의 미래에 내 신뢰를 보낸다. 그들이 보고 있는 그들의 미래에 내 시선을 보태는 것이다. 그들이 믿는 것을 나도 믿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내 믿음을 보내는 일은, 그들에게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유일한 조건일 수도 있다. 그들이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유일한 조건. 누구 한 사람이 나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도) 믿어 준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그건 피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고, 절대 꺾이지 말자는 다짐을 누차 다지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믿어 주는 일에 인색해지지 말자고 자주 생각한다. 오늘의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신념과 희망을 주로 바라보는 시간을 살자고 자주 생각하고.


나는 그들이 나를 일부러 속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속여 현실에 안주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말만 가지고 보면, 그들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 자신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도 나도 그게 ‘아직은’ 사실이 아닐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상당히 비합리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나마 그들이 자기 길에서 버틸 수 있다면, 그런 방책을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 희망이라는 게 처음에는 다 허무맹랑한 거 아닌가, 싶고. 




ⓒ 카쿠코 매거진, 박다빈,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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