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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22. 2020

밀착된 관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

사람을 칼날로 만드는 것


1.


내가 내 생활을 경계심 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 별일이 없을 때도 나와 별의별 이야기들을 오래 나누는 사람들.


그들은 내 가족이기도 하고, 내 가족이 아니기도 하다. 그들은 내 친구이기도 하고, 내 친구가 아니기도 하다. 그들은 내 연인이기도 하고, 내 연인이 아니기도 하다. 그들은 ‘아무나’이기도 하고, 아무나가 아니기도 하다.


가끔 나는 내 세계의 뒷면을 누군가에게 꾸준히 보여 준다.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을 믿어서.


그리고 또 가끔, 나는 본인 세계의 이면을 나에게 꾸준히 보여 주는 누군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지, 나를 믿는 건지, 혼자 생각해 보면서. 그 생각의 답을 내가 절반쯤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얼마나 야릇한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누군가를 믿는 것은 어쩌면 한몸이겠기에, 나는 그 둘을 구분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다. 뭐가 먼저인지도 사실 불분명하겠다.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를 믿는가. 아니면, 그를 믿어서 (또는 믿을 수 있어서) 그를 좋아하는가. 뭐가 먼저인지가 중요한가.


뭐가 먼저 발생되었건, 믿음과 호감은 한 세트일 때가 허다하다. 일종의 묶음 상품처럼, 그것들이 거의 항상 같이 있는 것이다. 상호작용하면서.


믿음과 호감의 협업에 대해 인간이 알아 둬야 할 건, 이뿐인지도 모른다. 믿음과 호감은 협업하는 관계일 때가 많다는 사실. 여기에 대해 뭔가 더 알려고 하면,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지는 것 같아서. 알아지는 건 딱히 없는데….


아무튼 자기 생의 안과 밖을 내 쪽으로 자꾸 내보이는 사람은 나에게 어떤 좋은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그 좋은 마음만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 사람은 나에 대한 좋은 마음과 개인적인 목적(나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다거나…)을 가졌을 수도 있고, 그냥 좋은 마음만 가졌을 수도 있고, 그렇겠다.


그 사람 내면에 뭐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그 사람만 알 것이다. 때로는 그 사람도 그걸 모를 것이다. 본인이 왜 자기 생의 이모저모를 나라는 인간에게 부지런히 보여주게 되는 건지. 믿음과 호감의 협업은 간혹 그들의 숙주宿主도 모르게 이루어지니까.





2.


“너무 가까우면 한 번씩 베이지.”


한 번씩 당신은 그런 말을 했다. 사람들 사이가 너무 가까워 그들이 온갖 것들을 나누다 보면, 한 번씩 누가 누구를 베고 만다고. 그 이유가 뭐였건, 이쪽이 저쪽을 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그런 때 당신은 그런 말도 했다. 자신에게서 칼날이 돋아나는 때를 정확히 알아차리고, 그때부터 자신을 차분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고. 당신 자신은 아직 그 일에 숙련되지 못했다고. 당신 자신이 그런 마당에, 누구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냐고. 자기가 못하는 걸 남에게 해 달라고 하는 파렴치한이 될 수는 없다고.


당신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위기 대처 능력을 믿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당신과 상관없는 어떤 일로 누군가가 날을 세울 때면, 얼른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선다고 하였다. 그 칼날에 다치지 않으려고.


그가 당신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당신이 알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는 당신을 해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로, 당신은 그에게서 한동안 떨어져 있는다고 하였다. 그가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어도. 당신은 의리로 그의 칼날에 맞아 주지 않는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우리가 지금 너무 가깝지?”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그 말을 했다. 내가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나, 모르겠단 말만 뱉어 놓고 있던 때(그날 당신을 만나기 직전에, 나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을 겪었다).


당신이 그 말을 하자마자, 나는 당신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당신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 끄트머리에 내려놓고, 날숨을 오래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당신은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나는 당신의 입가를 적시는 새하얀 연기를 바라보며, 내가 당신에게 실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애꿎은 당신에게. 내 등허리와 발바닥이 순식간에 뜨끈해졌다.


그날 당신은 내 사과를 듣자마자 “뭐, 괜찮아.”라고 했다. 그러더니 곧장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당신은 무엇에도 붙잡히지 않고 나와 헤어졌다.


나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당신은 나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가벼운 신경질을 내지도 않았다.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탈 버스가 버스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걸 확인할 때까지, 당신은 내 모든 이야기에 반응했다.


버스에 올라타기 직전에, 당신은 내 어깨를 살짝 쥐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너무 가까워. 그래서야.”


그날 이후로, 당신은 나에게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 연락에 응답하지도 않았다. 얼추 열흘 정도 그랬다.


나는 당신의 대처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나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거세게….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고 만 나 자신을. 당신을 불러 놓고, 당신에게 칼날만 들이민 나 자신을.


그 오랜 자책 끝에, 나는 당신이 예전에 나에게 해 준 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본인이 칼날로 돌변하는 순간에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모두가 그 일을 어려워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나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칼날이 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준비. 누가 칼날이 되고 있을 때, 그에게서 멀어질 준비. 그리고 이 점을 기억하려는 노력도 나는 부지런히 해야 한다. 내가 그 칼날이면서 그 칼날이 아니라는 점을. 칼날이 되고 말았을 때,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내가 나이면서 나 자신이 아닌 그 순간에, 나는 나이면서 분노다.


사람이 사람을 칼날로 만드는 에너지가 분노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자신이 칼날이 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또한 자신의 분노 때문이라고. 분노는 사람의 오감과 정신을 먹통으로 만드니까.


분노는 숙주의 의식에 자신만 남겨 두고자 하는 욕구가 상당히 강하다고, 당신은 말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뭔가에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만 하기가 쉽다고. 다른 건 돌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감정 중 하나가 분노라고. 방심하면 방심할수록, 본인 손으로 더 많은 것들을 베게 될 테니까. 본인 손으로.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 순으로.




이 산문은 이야기집 《같이 플라타너스를 보러 갈까요》에 수록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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