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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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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05. 2016

곱슬머리 작곡가

   피아노 근처에는 쓰다 만 악보 종이가 온통 널브러져 있다. 황갈색 피아노 페달 위에도 악보 종이가 걸쳐져 있다. 가죽으로 된 피아노 의자엔 작곡가가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작곡가의 은색 곱슬머리가 얼마간 헝클어져 있었다.

   작곡가는 방 가운데 놓인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물이 반 잔쯤 남아 있었다. 목 안쪽이 컬컬했다. 그렇다고 그리로 가 물을 들이켜진 않았다. 작곡가는 고갤 돌리고 안경을 밀어 올렸다. 잉크 듬뿍 머금은 만년필촉이 악보 언저릴 빠르게 휘갈겨댔다.

   작곡가는 그곳에 자신만 아는 기호들로 음표를 그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간단한 기호들을 고안한 것이다. 잉크 덜 마른 악보가 바닥으로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작곡가가 손에서 일부러 놓아 버린 것이다. 카펫에 푸른 잉크가 스며들었다.    


   작곡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섰다. 거실 너머에 주방이 있었다. 작곡가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원목 식탁 구석에 놓인 블루베리 한 줌을 입 안 가득 넣고 씹었다. 블루베리 접시 옆에 위스키가 있었지만 그것은 작곡가의 것이 아니었다.

   작곡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원래부터 술을 마시지 않은 건 아니었다. 피아니스트 시절엔 연주자들과 함께 어울려 거의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셨다. 술이 아니라면 커피에 절어 있었다. 작곡가는 집보다 노천카페나 술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항상 어디에든 취해 있었다. 그런 게 예술가적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작곡가로 전향을 결심한 그 날부터 작곡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건 아니었다. 작곡가 자신이 커다란 결단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흔한 계획조차 없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작곡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 날처럼…….

   작곡가는 검은 옷소매로 오른쪽 입술 끝을 훔쳤다. 보라색 과즙이 말끔히 닦여 나갔다. 주전자를 열어 봤지만 목 축일 만한 게 들어 있지 않았다. 작곡가는 물 담은 주전자를 거실로 들고 나왔다. 그것을 벽난로 고리에 걸었다.     


   방에서 악보 뭉치를 가지고 나온 작곡가가 벽난로 앞 마루 바닥에 주저앉았다. 장작 타는 매캐한 냄새와 소리의 조화가 은은했다. 작곡가는 빈 악보 종이 다섯 장을 바닥에 일렬로 펼쳐 놓았다. 그리고 마음 가는 음 하나를 골라 악보 첫 머리에 그려 넣었다.

   작곡가는 그 첫 음을 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흥얼거림의 선율과 리듬에 따라 악보는 여러 기호들로 채워졌다. 동료들이 우습다고 수군댈 때가 있었지만 작곡가에게 이 작곡 방법은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도구였다. 물론 작곡가가 이 외의 작곡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료들이 그 작곡 방식을 두고 수군댄 이유는 평소 작곡가의 성격이 강박적일 만큼 계획적이라는 데 있었다. 작곡가는 매사에 철두철미했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음악 만들 땐 한없이 무계획하고 즉흥적인 것이었다.

   그 모습이 우습긴 작곡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작곡가로 살아온 3년 세월이 그랬듯 이 특이한 작곡 방법도 그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마치 모든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던 것처럼 그는 작곡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이 참신한 작곡 방법을 얻었고 그런 채로 살아왔다. 

   때론 자기 자신이 음악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완성된 곡을 그저 받아 적기만 하는 기분도 들었다.     


   악보를 3장 째 그린 작곡가는 주방에서 손잡이 달린 도자기 컵을 들고 나왔다. 컵은 먼지 한 점 없이 새하얗고 매끈했다. 과연 그의 것이라 할 만했다. 작곡가는 벽난로 옆에 걸린 장갑을 끼고 주전자를 빼냈다. 하얀 도자기 컵에 흰 수증기 펄펄 내뿜는 물이 담겼다. 차가운 물을 컵에 따를 때와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를 때의 소리 차이를 느끼며 작곡가는 주전자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마루에 물이 튀어 있었는지 주전자가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가 났다.

   작곡가는 소파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암막 커튼이 온 집에 쳐져 있었다. 볼 수 있는 ‘창밖’이란 건 한 뼘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작곡가는 뜨거운 물을 조금 홀짝인 후 컵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만년필 쥐고 있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가 뻐근했다. 작곡가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몰입의 흔적이 몸에 남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딘가에 쓸모 있단 사실을 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곡가는 3년 동안 매일 한 곡의 음악을 만들었다. 가끔은 긴 분량의 곡을 쓰기도 했지만 대개 10분짜리 곡을 썼다. 악기 배치도 작곡가 마음대로 했다. 오케스트라나 현악 몇 중주 같은 개념이 없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자유로운 형식의 악상만 영감으로 떠올랐다.

   처음 작곡가는 그 근본 없는 영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쏟아지는 그 영감들을 쳐내고 세상에 정해진 형식에 따라 작곡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머릿속은 더 광활한 백색 평원이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뭐가 떠오른다 한들 이미 있는 곡들을 짜깁기 한 것뿐이었다. 끝내 작곡가는 자신에게 온 영감의 물줄기를 받아들였다. 세상의 기준에 들어맞는 구석이라곤 하나 없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작곡가는 컵을 내려놓고 창가에 다가섰다. 커튼을 걷었다. 짙푸른 새벽빛이 온몸에 와 닿았다. 창밖으로 텅 빈 동네 풍경이 정물화처럼 고여 있었다. 마치 그 자신만 이곳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곡가는 커튼을 여며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기대 누웠다. 면 재질로 된 소파 감촉이 작곡가를 감싸 안아 주는 듯했다. 그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는 그 시간, 작곡가의 하루는 끝나가고 있었다. 작곡가에게 이제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가 어떻다느니, 다들 어쩌고 산다느니…….

   새로 시작된 꿈결이 새 아침을 파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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