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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04. 2016

어학원 강사

   그곳은 어학원 3층 맨 구석에 위치한 강의실이었다. 강의실 문엔 직사각형 유리창이 달려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회화 A’라 적힌 그 강의실 안에선 수업이 한창이었다. 통통한 체격의 30대 후반 영국인 강사가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적고 있었다. 오늘은 물건 사는 법에 대한 회화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좁은 강의실엔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이 벽을 따라 빙 둘러앉아 있었다. 의자와 책상이 붙어 있는 게 불편한 모양인지 몇 사람은 계속 몸을 뒤채었다. 강사는 왼쪽 맨 앞에 앉아 있는 대학생을 향해 돌아섰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문장을 소리 내 읽어 보도록 권했다. 대학생은 목소릴 가다듬고 유제품 코너를 찾고 있단 그 문장을 단번에 읽어 내려갔다. 강사는 어눌한 한국말로 문장의 뜻을 알려 주었다. 이후로도 강사는 문장 읽기 시범을 대학생에게만 시켰다. 조금은 으쓱해 하고 조금은 민망해 하는 표정으로 대학생은 자기 맡은 바에 충실했다. 둘러앉은 수강생들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간혹 뭔가를 필기하기만 했다. 잡담도 없었다. 강사가 그들 앞앞이 발표를 시켜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여차저차 45분이 흘렀다. 강사가 얇은 교재를 엎으며 오늘 강의가 끝났음을 알렸다. 교재 표지에 노란 셔틀 버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수강생들은 처음 들어올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발표 담당 대학생은 눈짓으로 강사에게 인사를 보냈다.    


   이윽고 강사도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강사는 북적거리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 4층으로 올라갔다. 강사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강사 전용으로 마련된 휴게실이었다. 강사는 휴게실 가운데 놓인 크고 하얀 테이블에 검은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옅은 커피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서 누군가 방금 휴게실을 쓴 모양이었다. 강사는 전자레인지 옆에 있는 전기 포트 뚜껑을 열어 보았다. 김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이 두 컵 분량쯤 남아 있었다. 강사는 인스턴트 커피 두 봉지를 뜯어 종이컵에 쏟아 부었다. 그곳에 뜨거운 물을 붓고 종이컵 하나를 밑에 더 끼웠다. 한국인 강사에게서 배운 요령이었다.

   뜨겁지 않은 종이컵을 들고 강사는 창가로 향했다. 창밖으로 대학 캠퍼스가 펼쳐져 있었다. 정면으로 인공 호수가 보였다. 호수 오른편엔 소복이 모인 학생들이 누군가의 이야길 듣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디자인의 까만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공대 체육대회 날이었다.    


   강사도 한때는 이 대학 학생이었다. 7년 전 일이다. 강사는 영문학과 전공으로 석사 과정 공부 중이었다. 당시 지도교수는 세계 문학에 관심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아시아 문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지도교수는 아시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지도교수 연구실 책장엔 온갖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책장뿐 아니라 바닥까지 책들로 가득했다.

   지도교수 연구실을 들락거리던 강사는 자연스럽게 그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하루는 연구실에서 강사 혼자 지도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뚱히 앉아 있기 따분했던 강사는 책장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얇은 책 하나가 강사의 눈에 띄었다. 강사는 그것을 빼내 보았다. 영어로 번역된 한국 소설책이었다. 강사는 방금 뽑은 책 옆에 있던 한국어 판 원서도 뽑아 들었다. 한국어 판 원서는 번역본보다 두꺼웠다.

   자세히 보니 번역본 책은 출판된 게 아니었다. 지도교수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하여간 대단한 열정이었다. 강사는 혀를 내두르며 책 두권을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강사는 그 번역본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고갤 돌려 보니 2시간 40분쯤 지나 있었다. 강사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도 교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세미나 일정이 갑자기 변경돼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였다. 3시간 전에 발송된 메시지였다.

   강사는 이미 집에 돌아왔다는 답장을 지도교수에게 보냈다. 그리곤 방금 읽은 번역본 표지와 한국어 판 원서 표지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왔다.    

   3개월 뒤, 강사는 다시 지도교수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이번엔 지도교수도 함께였다. 강사의 앉은 자리 앞엔 한국어로 찍힌 소설책 네 권이 놓여 있었다. 그 중 한 권은 3개월 전 강사가 처음 본 그 책이었다. 지도교수가 직접 번역본까지 만들었던 그 책…….

   강사는 박사과정 시작한 뒤 한국으로 (교환 학생 개념의) 유학을 가고 싶어 했다. 마음 같으면 한국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강사가 다니던 대학과 그 근방 대학엔 한국 문학 과정이 개설된 데가 없었다. 아무런 연고 없이 한국에 들어가 박사 과정 면접을 보러 다닐 배짱도 없었다. 그나마 한국 문학에 가장 관심 많은 이가 지도교수였다. 아니, 영국에서 한국 문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지도교수라 해도 좋았다.

   지도교수는 제자의 열성이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걱정될 만큼은 아니었다. 강사는 지도교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고 그 아낌의 결정적 이유는 강사의 진중함에 있었다. 강사는 한낱 지나가는 흥미 때문에 진로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의 고민을 거쳤을 것이었다.

   지도교수는 강사를 한국으로 보내 줄 만한 방도를 백방으로 모색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강사는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사는 창틀에 종이컵을 놓고 돌아섰다. 아내의 전화였다. 강사는 “여보세요.” 하며 전화를 받았다. 한국인 아내는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 가며 강사에게 할 말을 차근차근 털어 놓았다. 주말에 있을 모임에 필요한 것들이 더 없을지 강사에게 묻고 있었다. 강사는 가방을 뒤적여 노란 연습장을 찾았다. 그곳에 적힌 목록들을 아내에게 천천히 불러 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내는 종이를 벽에 대고 눈앞에서 메모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그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저녁에 조금 늦을 거라 말하며 먼저 저녁 챙겨 먹으라고 말했다. 강사는 “알겠어.” 하고 대답하며 아내의 이름 두 글자를 불렀다. 

   강사의 가방 맨 안쪽엔 구석구석 낡은 소설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강사의 부적 같은 물건이었다. 책 표지엔 책 제목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작가 이름은 그 밑에 세로로 적혀 있었다. 작가의 이름 두 글자와 아내의 이름 두 글자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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