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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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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07. 2016

막걸리 집

   빗방울이 새파란 양철 지붕을 쉼 없이 때렸다. ‘통통’대는 소리는 허공을 손가락으로 찔러대는 듯했다. 하얀 플라스틱 처마에선 그보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오후 7시 12분. 하늘의 회색에 남색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근처 공사장 작업 시간이 끝난 지 1시간쯤 지나 있었다.

   플라스틱 처마 아래엔 나무로 짜 넣은 미닫이문이 있었다. 연식이 오래 돼 나뭇결이 거무스름했다. 미닫이문은 학교 교실 문처럼 윗부분이 유리로 돼 있었다. 한 쪽 유리엔 ‘파전, 해물파전, 명태 전, 깻잎 두부 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머지 한 쪽 유리엔 ‘막걸리, 동동주 일체’라고 적혀 있었다.

   막걸리 집 내부엔 공사장 인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근방에서 먹을 만한 안주 파는 술집은 이곳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검은색 면 재킷 걸친 남자가 처마 밑으로 뛰어 들었다. 재킷 왼쪽 가슴엔 남자의 직책이 노란 실로 수놓아져 있다. 남자도 근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오는 참이다.

   차림새로 봐서 남자는 임원에 속하는 듯했다. 옷자락에 흙이 묻어 있거나 땀 냄새가 나거나 낡아 빠진 운동화를 신고 있지 않았다. 남자의 목덜미에선 엷은 스킨 냄새가 났다. 남자는 문지방 위에 서서 막걸리 집 내부를 훑어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가게 왼쪽에 멎었다. 가게 왼쪽은 일본식 식당처럼 돼 있었다. 허리 높이까지 오는 벽 뒤에서 주인은 요리를 했다. 벽 둘레로 놓인 얇은 테이블 앞엔 혼자 온 사람 둘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가 찾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칠 벗겨진 누런색 스테인리스 막걸리 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남자는 북적거리는 테이블 사이를 헤집고 나가며 그쪽으로 향했다. 공사장 인부 몇몇이 남자를 알아보고 인사하려 몸을 쭈뼛거렸다. 정작 인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은 공사장이 아니라 술집이기도 했고 회사 임원이 인부인 자신을 알아봐 줄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찾던 사람 옆에 앉으며 주인에게 파전을 주문했다. 주인은 입술을 오므리며 고갤 끄덕거렸다. 남자는 저녁도 못 챙겨 먹고 헐레벌떡 이곳에 왔다. 점심도 시원찮게 먹은 터라 뱃속에서 전쟁이 나고 있었다.

   남자가 찾던 사람은 양팔을 테이블 위에 괴고 간장종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접시엔 전 부스러기만 좀 남아 있었다. 술에 좀 취한 듯 그는 현실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는 듯 보였다. 남자가 그의 팔뚝을 살짝 쥐고 흔들었다. 몇 년 만에 보는데 대뜸 안녕하냐고 묻기가 뭐했던 것이다.

   “나 기억 안 나나?”

   남자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는 뭐가 뭔지 모르겠단 얼굴로 남자의 두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염이 한참 자라 코밑과 턱이 시커멨다.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는 그제야 남자를 조금 알아보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그가 취기 때문에 그런 건지 성격이 그렇게 돼 버린 건지 남자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 기억하겠나?”

   남자가 다시 물었다. 기름 잔뜩 배어든 파전이 남자 앞에 놓였다. 파가 살짝 탄 부분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는 파전에게서 남자로 시선을 옮기며 “그럼.”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자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말했다. 남자는 어깨에서 힘을 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를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는 남자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알고 지낸 친구였다. 원래는 아내들이 친구였는데 가족들끼리 몇 번 만나며 그와 남자도 막역해졌다. 서글서글한 성격도 비슷했지만 둘 다 애주가여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나 세상 사는 이야기 쏟아 놓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그러다 4년 전, 남자가 이곳으로 발령을 오게 되면서부터 두 사람은 왕래가 끊겼다.

   남자는 건설 회사 간부였다. 왕래 끊기기 전, 친구는 포장지 만드는 공장의 과장으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 친구는 이 막걸리 집을 채운 인부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가 친구를 발견한 건 점심시간 후 3시쯤이었다. 공사 일정에 변경 사항이 생겨 남자는 간부 몇 사람과 공사장에 출장 와 있었다. 그들이 현장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기찻길 옆에서 낯익은 사람이 삽자루를 들고 있었다. 남자는 들고 있던 계약서 파일을 한데 추스르며 그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마침 삽을 쥔 그가 이쪽으로 몸을 틀며 흙을 옮겼다. 남자의 옛 동네 친구가 맞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어디 물어볼 데가 없었다. 주변에 인부들 잔뜩 있는데 친구들에게 가 아는 체를 하면 친구가 당황스러워 할 것도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남자는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로 돌아왔다. 꼬인 일정을 맞추고 계약서 새로 다 썼을 때가 6시 40분이었다. 남자는 옆 컨테이너 박스로 넘어갔다. 그곳은 사무실이 아니라 인부 용 휴게실이었다. 쉬는 시간은 따로 없었지만 명목상 휴게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휴게실 벽면에 인부 명단이 붙어 있었다. 남자는 거기서 친구의 이름과 증명사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길로 이 막걸리 집을 수소문해 찾아왔다. 여기선 일하고 갈 만한 데가 이 막걸리 집뿐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모든 물음이 상처가 될지도 몰라 남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파전 접시를 친구 쪽으로 밀며 동동주 한 되를 주문했다. 동동주는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겨져 나왔다. 친구는 젓가락을 한 짝씩 나눠 들고 파전을 찢었다. 참 오래간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젓가락을 연필 쥐듯 쥐고 전을 찢는다며 남자는 친구를 자주 놀렸었다.

   “차 가져온 거 아닌가?”

   친구가 한 입 크기로 다 찢은 파전 접시를 남자 쪽으로 다시 밀며 물었다. 남자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일 간다. 일이 덜 끝나서.” 하고 대답했다. 필요한 계약은 아까 6시 40분에 모두 체결되었고 함께 온 간부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친구는 고갤 느리게 끄덕이며 막걸리 잔에 동동주를 따랐다. 남자의 갈색 동동주 잔에도 술을 채워 주었다. 남자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차를 몰고 올 때까지만 해도 복잡하던 가슴이 휑하니 비어 버렸다.

   남자는 잔을 들고 조금 웃었다. 친구가 잔을 부딪쳐 주며 낯익은 표정으로 웃었다. 둘은 자기 몫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들 앞에서 파전 반죽 휘젓던 주인이 그들을 힐끗거렸다. 비가 더 쏟아질 모양인지 막걸리 집 밖에서 낮은 천둥이 울었다. 잠기지 않은 남자의 차 백미러가 흐려지는 빗속 풍경을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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