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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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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11. 2016

아파트 단지 분수대

   여자는 분수대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이의 보조개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조개가 어찌나 깊은지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다. 매미소리가 자동차 소리보다 더 큰 8월 초순. 아이는 물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 속을 뛰어 다니며 숨 넘어가게 웃고 있었다. 연갈색 티셔츠 입은 아이 엄마는 빨대 달린 물통을 들고 아이를 살피고 있었다. 걱정스러워 하는 마음과 아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게 해 주려는 마음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분수대에서 다시 한 번 물이 뿜어져 나왔다. 기분 좋은 소리가 ‘싸아아…….’ 하고 터져 나왔다. 애초에 물놀이용으로 만들어진 분수대라 그런지 물줄기가 그리 세게 나오진 않았다. 아이는 손바닥과 턱으로 물줄기를 받아내며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여자는 정강이에 튄 물기를 닦지 않고 계속 걸었다. 샌들이 젖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무더위 쉼터’라고 적힌 등나무 그늘 속으로 여자는 들어가 앉았다.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그늘 속도 뜨겁긴 마찬가지였지만 여자는 그런 열기를 좋아했다. 뼛속까지 소독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조개가 예쁜 아이는 아직 분수대 속에 있었다. 빨간 신발에서 ‘삑삑’대는 소리가 나 저절로 시선이 잡아끌렸다. 여자는 반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다 말았다. 핸드폰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수대 뒤로 보이는 107동 건물이 여자가 사는 곳이었다.

   여자는 시선을 돌려 아파트 입구를 바라보았다.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굵은 기둥이 입구 양쪽을 지키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이곳으로 처음 이사 오던 날을 떠올렸다. 짐이랄 게 없어서 캐리어 두 개만 끌고 택시에서 내렸던 게 벌써 3년 전이다. 매끈한 신축 아파트 입구 바닥에 캐리어 바퀴 끌리던 소리와 그 날 불던 바람의 축축함 같은 것들이 여자의 몸속에서 되살아났다.

   정글처럼 느껴지던 아파트 단지가 ‘내 동네, 내 집’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 딱 한 달이었다. 여자는 인간 적응 능력의 신비로움에 다시 몸서리쳤다. 여자가 이사 온 지 두 달 반쯤 됐을 때 여자의 집으로 첫 방문객이 찾아왔다.   


   여자는 흰 수건을 머리에 감은 채 주방에서 망고를 썰어 먹고 있었다. 원랜 거실로 가져가려다가 별로 먹을 것도 없다 싶어 그 자리에서 해치우던 참이다. 

   “누구세요?”

   인터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여자가 말했다. 인터폰 화면 너머로 보이던 옆모습이 앞모습으로 바뀌었다. 여자는 씹고 있던 망고를 삼키지 못하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여자 머리에 둘러져 있던 흰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만. 5분만.”

   아까완 다른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가운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자신의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현관문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남자의 입에서 “허오.”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날숨이 새어 나왔다. 쫓겨날 확률이 70% 이상이라 생각하고 온 까닭이다. 

   7분 뒤 현관문이 열렸다. 여자의 머리엔 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눈만 끔벅거렸다. 목요일 저녁 7시 21분이었다. 

   “들어와.”

   여자가 현관문을 쭉 밀어 주며 말했다. 남자는 바지 허리 부분을 까닭 없이 긁적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가정집 냄새가 와락 끼쳐 들었다. 여자는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10년 넘게 혼자 살아 온 남자는 혼자 사는 사람의 집안 동선 배치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혼자 사는 집은 혼자 사는 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쭈뼛거리며 회색 소파에 앉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갈색 벽에 TV가 걸려 있었다. TV 밑 수납장에 얹힌 리모컨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여전히 TV와 담을 쌓고 지내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기다란 유리컵에 얼음물을 두 잔 따라 왔다. 손님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도 아닌 이에게 뭘 대접해야 좋을지 몰랐다. 주스 마시고 커피 마시고 과자 까먹으며 얘기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파 앞 테이블에 컵을 놓고 여자는 남자의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남자는 목이 타는 건지 가만 있기가 힘겨운 건지 얼음만 남기고 물을 다 마셨다.

   “너 아무한테나 이렇게 문 열어 주고 그러면 안 돼.”

   남자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게. 괜히 열어 줬나 봐. 이제 아무나인데.”

   여자가 베란다를 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남자는 작게 헛기침하며 침묵했다.

   “왜 왔어? 어떻게 알고.”

   여자가 여전히 집밖을 내다보는 채로 물었다.

   “회사에 전화해 봤다.”

   “아, 맞어. 요즘 회사는 인력만 쓰는 게 아니라 직원 정보도 막 쓰지?”

   “나 갈까?”

   “기껏 와 놓고 왜 간다는데?”

   “내가 여기 있길 원하는 태도가 아니잖아, 지금 니 태도.”

   “언제부터 그렇게 내 태도를 존중했대? 가지 말랄 때는 기어코 가더니? 뭐야? 왜 온 건데? 내 속 뒤집어 놓으려고 왔어?”

   여자의 목소리 끝에 날이 섰다. 남자는 눈치 챌 수 없는 울먹임도 서렸다. 남자는 아랫배 끝까지 숨을 가득 들이켰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우리 사이에 바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뿐이야. 기회……. 그때 내가 더 두고 그렇게 가 버린 걸 내 실수라 부르든 실패라 부르든 상처라 부르든 가해라 부르든 그건 너 좋을 대로 해. 더 화내고 더 분해하고 더 생각할 시간 필요해? 그럼 그렇게 하게 해 줄게. 이해해. 다 이해해. 다만 난 알고 싶을 뿐이야. 니 진심이 뭔지. 우리한테 아직 기회가 있다고 느끼는지 아닌지. 나한테 어떤 기회를 한 번 더 줘 보고 싶은지 아닌지. 너도 아직 니 진심이 뭔 줄 모른다면 혹은 나한테 아직 그 진심 알려 줄 생각 없는 거면 이만 갈게. 다음엔 얘기해 주라. 문자를 보내든지. 너 괴롭히는 느낌 되게 힘들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는 미동하지 않았다.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문이 닫혔다.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맡에 놓인 핸드폰을 집들었다. 최근 기록 맨 위에 남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받기 전에 끊었다. 여자가 거실로 나왔다. 현관문에서 벨이 울리고 인터폰 화면이 켜졌다.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분수대 물줄기가 멎었다. 보조개 예쁜 아이는 “엄마, 이거 다시 켜 줘.”라며 분수대 바닥을 가리켰다. 아이 엄마는 웃음을 터뜨리며 밥 먹고 나와서 또 놀자고 아이를 얼렀다. 아이는 자신이 먹고 싶은 반찬 이름을 대며 그걸 해 준다면 기꺼이 귀가할 것을 선포했다. 아이 엄마는 고갤 끄덕이며 아이 어깨를 잡았다.

   분수대 옆 시계탑이 오전 11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요일 오전 치고 아파트 단지가 한산했다. 여자는 분수대 너머 107동을 다시 바라보았다. 1층부터 눈으로 세어 가며 자신이 살고 있는 17층을 찾아냈다. 베란다에 파란 이불 널려 있는 게 여자의 집이었다. 파란 이불 옆에 흰 티셔츠 세 장이 더 걸려 있었다. 여자가 산책 나오기 전에 깜빡하고 널지 못한 것들이었다.

   여자는 머리카락 끝을 돌돌 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지에 밴 땀이 바르며 다리까지 시원한 느낌이 났다. 여자는 다시 자기 집을 올려다보았다. 흰 티셔츠 세 장이 더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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