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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13. 2016

한밤중 편지

   하얀색 2층 주택에는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 2층 내부 전체가 밝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맨 왼쪽 방만 밝혀져 있었다. 2층 복도 벽에 매달린 주홍색 조명들이 2층 둘레를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2층 맨 왼쪽 방 창문 너머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창가로 난 길쭉한 책상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턱에 가려져 있던 그의 모습은 그렇게 보였으나 사실 그는 뭔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책상엔 하얀 연습장과 스테인리스 연필꽂이 그리고 스테인리스 물컵만 올려져 있었다. 용도에 딱 필요한 만큼만 마련해 놓는 그의 성격은 그의 방뿐만 아니라 온 집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의 집엔 늘 넉넉한 수납공간이 장만돼 있었다. 그는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쓰지 않는 물건을 나눠 주기도 하고 복지 시설에 생활용품들을 기증하기도 했다.

   연습장 한 장이 뜯겨 나갔다. 그는 떼어낸 종이를 연습장 오른편에 놓고 다시 빈 종이를 채웠다. 그의 손 안에 든 까만 만년필은 그의 체온만큼 혹은 그보다 더 달궈져 있었다. 연습장은 스프링 노트가 아니라 쉽게 뜯을 수 있는 것이어서 책상엔 종이 부스러기가 나돌아 다니지 않았다. 그는 몇 년째 이 연습장만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는 카운슬러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쉽게 상담자나 상담가라 불러도 되련만 그의 카운슬러는 자신이 카운슬러라 불리길 좋아했다. 꼭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카운슬러는 자신을 자꾸 카운슬러라 지칭했다. 그 호칭에 뻐근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남자는 최근 일어난 자신의 변화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을 2장 째 쓰고 있었다. 그 변화가 자신에게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쓰느라 아직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부분은 적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막 ‘아시다시피’라는 단어를 써 넣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정말 계획적인 사람입니다. 좋게 말해 계획적이지 별로 인간적인 타입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 저의 그런 생활 방식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두어 달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저는 인간적으로 살기에 적합한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부모님을 탓하진 않습니다. 그저 이게 제 운명이려니, 하고 살 뿐이죠.

   그렇다고 제가 지금 인간적인 사람으로 돌변했느냐고요? 글쎄요. 거기까진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제 일상의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렸단 겁니다. 이 편지도 무너진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있겠네요. 애초 협의 사항에 없던 편지를 쓰다니요!

   그 여자가 도대체 제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참, 이건 너무 우스운 질문이군요. 답을 알거든요. 그 여자는 제게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정말 아무 짓도요.

   생각할수록 너무 이상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 여자 생각이 나고 그 여자가 어딘가에 내뱉은 말들이 곱씹히고 그 여자 습관과 취미와 말투를 따라하게 되고 뭐든 그 여자 방식대로 하게 됩니다. 

   그 여자를 좋아하냐고요? 여기가 제일 웃긴 포인트입니다. 들어 보세요. 전 모르겠습니다. 이게 제 대답입니다. 모르겠어요. 좋아하는지 뭔지 모르겠다고요. 저랑 성격도 너무 다르고 살아온 모습도 너무 다르고 기본 생활 방식도 너무 다른데……. 그래서 처음엔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했는데……. 그 여자를 좋아하냐고요? 제가 이 질문에 ‘모르겠다.’ 말고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당장은 모르겠어요. 그냥 그 여자한테 휘말려 간단 느낌밖에 들지 않아요. 신경 꺼야지 하면서도 온갖 신경 다 쓰는 내가 한심할 지경입니다. 벌써 몇 달 째 제대로 된 일을 하지도 못했어요. 일을 망친 건 아니지만 예전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진 않다고요. 뭐죠, 이게 도대체……. 

   이 밤늦은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먹고 자는 패턴도 완전히 깨져 버렸어요. 그 여자랑 무슨 대화라도 하는 날이면 잠이 다 뭐랍니까? 밤을 꼴딱 새 버려요. 뭐하면서 새냐고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꼼짝을 못하겠어요. 

   누구라도 제게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증상의 정체가 뭔지 뾰족이 말해 주면 좋겠군요. 무슨 말을 들어도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진 않다마는…….

   제 나이가 서른여섯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살부터 사는 느낌입니다. 요즘은 완전히 백지 상태예요. 그 동안의 제가 진짜 저였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의문스럽단 말을 많이 쓰게 되네요. 손닿는 모든 게 의문스런 요즘이거든요. 제가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카운슬러님, 이게 제 본모습일까요? 아니면 사람에겐 원래 여러 종류의 본모습이 있나요? 다음 상담 때는 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얘길 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아 별 헛소리만 하다 왔군요.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뿌연 햇살이 카운슬러의 사무실 현관을 비췄다. 목말라 보이는 장미 몇 송이가 현관 옆에 허릴 숙이고 있다. 현관 오른편 빨간 우편함엔 우표 없는 편지봉투가 꽂혀 있다. 남자가 출근길에 넣어 놓고 간 것이다. 

   오전 8시 17분. 카운슬러가 우편함에서 편지봉투를 꺼낸다. 우표 없이 보낸 사람 이름만 덜렁 적힌 편지봉투를 들여다보며 카운슬러는 조금 웃는다. 하얀 뺨에 부드러운 굴곡이 생긴다. 전 날 남자의 불안정한 태도와 “다음 주엔 진짜 제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넥타이 없이 단추 푼 셔츠 차림 하고 나타난 남자는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들어 버린 사건을 털어놓겠다고 예고했다. 그 예고의 결과물이 이 편지봉투 속에 담겨 있나 보았다. 적어도 카운슬러의 예감은 그랬다. 

   카운슬러는 사무실로 들어가 커피 메이커에 커피콩을 두 스푼 쏟아 넣었다. 몇 가지 버튼이 눌리자 커피콩 갈리는 소리와 함께 커피 메이커가 작동되었다. 카운슬러는 검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편지봉투를 꺼냈다. 어제 잠깐 흘려 듣기로 남자의 엄청난 그 사건은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카운슬러는 반듯한 편지봉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자신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는 누군가의 등장에 태연히 반응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금세 정의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사랑이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게 사랑임을 알아차리는 게 가능한 일인가.

   카운슬러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카운슬러에게 사랑은 언제나 침입 혹은 침략의 느낌으로 왔다. 난데없고 당황스럽고 어떡해야 좋을지 막막해지는 느낌으로.

   카운슬러는 입속에서 두 문장을 우물거렸다. 언젠가 자신의 칼럼에 쓴 문장이다. 기쁨을 주든 아픔을 주든 자신을 다른 상태로 옮겨 놓는 모든 사람과 사건이 전부 사랑이더라고. 살아 보니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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