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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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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10. 2016

서랍 속 편지 뭉치

   “여보세요?”

   내가 전화를 받자 친구는 가방에서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나는 친구 새끼손가락 옆에 난 오랜 흉터를 바라보며 다시 “여보세요?” 하고 말했다. 

   “어…….”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난처한 목소릴 냈다.

   “누구세요?”

   핸드폰 액정을 살짝 떼고 그 모르는 번호를 다시 읽어 보며 내가 물었다.

   “최희주 씨 핸드폰 아닙니까?”

   “아닌데요.”

   내가 “여보세요?”와 “누구세요?”와 “아닌데요.”를 연달아 말하자 친구가 핸드폰 액정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쭉 내민 입모양으로 친구가 ‘누구야?’ 하고 물었다. 나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최희주 씨 핸드폰 아니에요?”

   수화기 너머 남자가 다시 내게 물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크다. 내가 들고 있는 이 은색 핸드폰이 최희주 씨 핸드폰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 눈치가 아닌 것 같다. 그래,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사실을 대하는 게 마치 제일 큰 거짓을 대하는 것 같을 때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은 죄다 가짜 같을 때가……. 하지만 뭐 어쩌랴. 나는 최희주가 아닌 것을. 최희주라는 사람 핸드폰을 훔쳐 전화 받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을. 

   “아니에요.”

   곧 전화 끊을 사람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그럼 끊을게요.’와 똑같은 억양이었다.

   “그럼 최희주 씨랑 관계가 어떻게 되는데요?”

   좀 다급해진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생각보다 집요하다. 내가 이 번호를 2년이나 썼는데 번호 바뀌기 전에 진작 연락해 볼 것이지. 꼭 다 끝나고 나서야 안달복달하는 사람이 있어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나는 별안간 뜨끔해졌다. 그 뒷북치기의 귀재가 누구였던가. 사람은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부분으로 사람들을 평가한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냥 번호가 바뀐 거 같은데요.” 하고 말했다.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잠시 후 아무런 대꾸 없이 전화가 툭 끊겼다. 

   “뭔데? 누군데?”

   내가 핸드폰 내려놓기 무섭게 친구가 물었다. 

   “몰라. 자꾸 최희주 찾잖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친구는 내 말에 안심하며 소파 위로 올라갔다. 나는 친구가 타 준 복숭아 아이스티를 다시 홀짝거리며 TV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입막음 당하고 있던 TV 볼륨이 친구 집 거실로 와르르 쏟아졌다. 친구는 자릴 잡고 누워 TV에 집중했다. 아까 생긴 묘한 기분은 내 마음을 여전히 흔들어대고 있었다. 뒷북치는 사람 옆에서 볼 땐 뭐 저렇게 한심하냐 싶지만 사실 당사자한테 그건 뒷북이 아닌 건데…….     


   보고 있던 TV 프로그램이 끝나고 친구는 내게 맥주를 권했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 두 종류를 냉장고에 사 뒀던 걸 아까 봤다. 하지만 나는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서 보고 싶은 게 있었다.

   하룻밤 자기로 해 놓고 집에 도로 가 버리려는 내가 친구는 못내 서운한 모양이었다. 친구는 내 가방에 과자 한 봉지를 넣어 주며 “가, 가 버려.” 하고 말했다.

   “다음 주에 제대로 놀자. 다음 주에 내가 텐트 들고 올게. 옥상에서 자자. 너네 집 옥상 좋아. 나 밉다고 맥주 그거 다 마시면 안 돼. 남겨 놔, 알았지?”

   내가 없는 아양을 떨자 친구는 현관 앞에 서서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왜.”

   “너 좀 그렇다, 지금.”

   “뭐가 그래?”

   “무슨 일 있냐?”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너 지금 되게 부자연스러워.”

   나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왼쪽 팔에 걸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 세 글자를 말했다. 나도 알고 친구도 아는 그 이름.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많이 울린 그 이름을.

   친구의 표정이 안 좋다. 내 표정도 그리 좋진 않을 거다.

   “그 사람 왜.”

   뭔가를 많이 억누른 말투로 친구가 물었다.

   “갑자기 생각났어.”

   “아까 그 전화 때문에?”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안 좋냐, 많이?”

   “뭐가 안 좋아.”

   “마음이.”

   “응. 안 좋아. 많이 안 좋아. 그래서 혼자 있어야겠어. 미안해.”

   친구는 조용히 현관에서 물러섰다. 나는 억지웃음을 좀 지으며 친구를 살짝 끌어안았다. 친구에게서 아까 같이 먹은 감자 과자 냄새가 났다.     


   집 앞 슈퍼를 지나고 있었다. 슈퍼 앞에 걸린 까만 디지털시계에 눈길이 쏠렸다. 벌써 밤 9시였다. 9시 7분. 오랜만에 오래 걸었더니 발바닥이 후끈거렸다. 친구 집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길이다. 집에 가서 ‘그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만큼 그걸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나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차가운 물을 내리 두 컵 마셨다. 목 안쪽이 얼얼했다. 컵 들고 있는 채로 잠시 서 있었던 것도 같다. 컵 내려놓고 거실에 불 켜고 나서야 방문에 시선이 갔다. 나는 현관문 앞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 안에서 친구가 준 과자 봉지가 부스럭거렸다.

   창문 닫고 나갔더니 방 안 공기가 탁했다. 나는 천장 전등 대신 침대 옆 스탠드 조명을 켰다. 노란색과 주황색 사이의 불빛이 침대를 환히 밝혔다. 침대에 걸터앉아 팔을 쭉 뻗어 창문을 연 뒤 맞은편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상 밑 서랍에 ‘그것’이 있다.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등짝이 간질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 쥐난 듯 찌릿한 거 같기도 했다. 창밖에서 비 냄새가 밀려들었다. 비 오기 직전에 나는 냄새. 

   서랍을 열자마자 보인 건 노란색 종이 뭉치들이었다. 이것들을 넣어 놓기만 했지 한 번도 정리해 본 적은 없다. 편지들이다. 아까 친구 앞에서 말한 그 이름 앞으로 쓴 편지들이다. 내 뒷북의 생생한 증거품들이다. 

   나는 서랍 가장 뒤쪽에 있는 편지 하나를 꺼냈다. 차마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아 편지지 겉에 적힌 날짜만 보았다. 8개월 전이다. 편지를 막 쓰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그러니 미안하단 말이 가장 많이 적혀 있으리라. 미안하다고. 한 박자 늦게 마음을 알아서, 한 박자 늦게 마음을 열어서 너무 미안하다고.

   그가 나를 간절해 했던 시절에 나는 그에게 무감각했다. 무감각하기만 하면 됐으련만 나는 그를 밀어냈다. 우린 아니라고 하며 그가 나를 포기해 주길 부탁했다. 때론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2년 조금 넘는 세월 동안 내 곁을 맴돌며 나를 기다렸다. 단 한 번을 내게 큰소리 내지 않았고 단 한 번을 내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너무도 냉정했고 강압적이었다. 2년 정도를 그렇게 보내면서 나는 겁 없이 확신하기도 했다. ‘이만큼 시간 지나는 동안 내 마음이 이렇게 요지부동인데 나중인들 뭐가 달라지겠어?’ 하고.

   근데 그 나중이 왔을 때 우리의 전세는 역전돼 있었다. 그가 나를 간절해 한 지 2년 반이 지났을 때 그는 마침내 내게서 돌아섰다. 그로부터 반년이 흘렀을 때 나는 벼락 맞은 듯 깨달았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나는 그때부터 그를 수소문했고 그를 찾았고 그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나를 간절해 하거나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열기가 빠져 나간 그의 눈빛이 나를 스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베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였다. 그가 내게 존댓말로 그렇게 말했다. 사촌오빠 친구여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내게 말을 놓았던 그가 존댓말을 사용했다.   

   들고 있던 편지를 서랍 속에 다시 넣었다. 책상 위엔 쓰다 만 편지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나는 오늘’까지만 적혀 있었다.

   어떤 음악은 엇박자로 시작하지만 제 박자로 돌아가 가사와 멜로디를 전달한다. 나는 우리가 엇박자로 시작된 유난히 긴 전주 속을 걷고 있는 거라 믿기로 했다. 첫 소절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나는 모른다. 그는 첫 소절이 시작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2년과 내 1년처럼.




홈페이지 : www.parkdabin.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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