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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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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12. 2016

날개 슈퍼

   마음이 어수선해질 때면 바다에 갔다. 집 앞에 바다가 있으니까. 모래사장과 맞닿은 새하얀 콘크리트길 근처엔 날개 슈퍼라는 구멍가게가 있다. 내가 이 동네에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역사 깊은 슈퍼다. 원랜 슈퍼가 아니라 ‘점방’이었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조그만 슈퍼를 점방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상점으로 쓰는 방이라고 해서…….

   날개 슈퍼가 점방이었던 시절엔 슈퍼 집 큰아들 이름이 점방 이름이었다. 그런데 큰아들이 사고로 죽자 슈퍼 집 아저씨가 원래 간판을 허물고 ‘날개 슈퍼’라는 간판을 새로 달았다. 사연이 기구하긴 하지만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은가. 날개 슈퍼.

   마음이 덜그럭거릴 땐 주로 바닷길을 걸었고 그런 마음이 조금 잔잔해지면 날개 슈퍼로 갔다. 갈색 포장의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가지고 나와 슈퍼 앞 평상에 앉았다. 노란 장판 깔린 평상은 사람 손길을 타 반들반들 윤이 났다. 나는 거기 구부정하게 앉아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 먹었다. 일회용 숟가락이 휘도록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 먹었다. 바다를 내다봤다가 하늘을 멀찍이 바라봤다가 우리 동네를 휘둘러봤다가 하며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 먹었다. 끝까지 먹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아저씨, 계산할게요.”

   내가 아이스크림 통을 카운터 한편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카운터 옆에 놓인 작은 TV를 보고 있던 슈퍼 집 아저씨가 나를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작은 TV에선 바둑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손님 없는 평일 오후에 아저씨는 혼자서 바둑을 두곤 했다. 카운터 한편에 접이식 바둑판을 가져다 놓고 흰 돌을 얹었다가 검은 돌을 얹었다가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저 평상에서 아이스크림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거랑 아저씨가 혼자 바둑 두는 거랑 비슷한 느낌일까.

   “5000원이다. 또 싱숭생숭하냐.”

   아저씨가 수염 거뭇거뭇 난 인중을 움직이며 내게 물었다.

   “넵…….”

   시원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5000원 짜리 지폐를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는 “음…….” 하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카운터에 놓여 있던 막대 사탕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요즘 애들은 단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아저씨가 다시 TV 쪽으로 고갤 돌리며 말했다. 나는 아저씨를 향해 꾸벅 인사한 뒤 아이스크림과 막대사탕과 일회용 숟가락을 들고 나왔다. 구름에 가려 해가 보이진 않았지만 햇살 밝은 오후였다. 슬리퍼를 가지런히 벗어 놓고 따뜻한 평상 위로 올라왔다. 저 멀리 방파제 쪽에 사람 둘이 걷고 있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손끝으로 부지런히 바다를 가리켰고 그들 중 한 사람은 카메라 렌즈를 이리저리 들이밀었다. 이미 친숙해진 것들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스크림 통을 감쌌던 투명한 비닐을 벗겨 평상 밑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네모나고 파란 쓰레기통은 아저씨가 나를 위해 놓아둔 것이었다. 쓰레기통 안에는 아저씨가 피운 담배꽁초와 내가 버린 비닐만 담겨 있었다.

   나는 날개 슈퍼의 몇 안 남은 단골이다. 이제 동네 사람들은 날개 슈퍼 대신 프랜차이즈 마트와 편의점을 찾는다. 사실 나도 날개 슈퍼보다 마트와 편의점을 더 자주 이용한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내 마음 토닥여 줄 수 있는 공간은 날개 슈퍼뿐이다.

   익숙한 것들은 쉽게 지루해진다. 하지만 익숙한 것들만 안겨 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편안함이라든지 안정감이라든지 안심 되는 느낌이라든지……. 그 특별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익숙한 것들은 쉽게 지루해지지만 쉽게 버려지지도 않는다. 날개 슈퍼가 예전처럼 흥행하진 않아도 뭇 사람들이 날개 슈퍼를 아직 찾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누군가는 막걸리를, 누군가는 유리병에 든 두유를, 누군가는 강냉이 한 봉지를, 누군가는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아이스크림 테두리가 금세 녹아 허옇게 흐물거리고 있다. 나는 연두색 일회용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푼 떠먹었다. 오래 걸은 탓에 텁텁하고 메말라 있던 입속이 촉촉하고 찬 기운으로 가득 찼다. 좀 살 것 같다.

   내가 해변을 터덜터덜 쏘다니고 들어온 저녁마다 엄마는 슬픈 눈을 지어 보였다. 언젠가는 내 양 어깰 잡고 “내가 널 너무 예민한 애로 만든 거니?” 하며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아마 그때 엄마는 술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고갤 젓지도 않고 끄덕거리지도 않고 엄마에게 붙들린 채 멀뚱히 서 있었다.

   글쎄, 엄마가 날 그렇게 만든 건가. 그렇다 할지라도 그게 뭐 나쁜 건가. 이렇게 반나절 정도 휘청휘청 걸어 다니다 보면 씻은 듯 나아지는데……. 엄만 뭐가 그렇게 늘 미안하기만 한 걸까. 엄만 내가 행복해 할 때도 “그런 걸 진작 누려 보게 해 줬어야 했는데……. 엄마가 돼 가지고선…….” 하며 울적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니 정작 예민한 건 내가 아니라 엄마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내 어느 부분을 통해 자신의 예민한 모습을 발견하곤 그렇게 축축한 눈빛을 하는 것이다. 근데 왜? 예민한 게 왜? 예민하다는 이유로 누가 엄말 밀어내기라도 했던 건가? 누구나 가끔 예민해지는 날이 있는 거 아닌가? 엄마랑 나만 그런 건가?    


   갈매기 한 마리가 청록색 바닷물 바로 위를 미끄러지듯 날고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어물어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준이다. 준이 목소리다. 어제 오전 10시쯤 준이 전화가 왔다. 영화 보러 가자고. 영화 보고 나서 새로 생긴 밥집에 가자고. 먹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나는 내 좋지 못한 마음 상태를 준이에게 알렸다. “마음 상태가 바람직하지 못해.” 하고 내가 말하면 준이는 모든 걸 알아들었다. 하루에서 이틀쯤은 혼자 있어야 하고 반드시 동네 바닷길을 3시간 이상 걸어야 하며 날개 슈퍼 앞에서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비워야 한다는 걸.   

   “근데 그거 꼭 혼자 해야 되는 거야?”

   거절당한 게 서운한지 뾰로통해 있긴 하지만 내 문제를 가볍게 대하지 않는 말투로 준이가 말했다.

   “응?”

   “꼭 혼자 걸어야 되냐고. 아이스크림도 꼭 혼자 먹어야 되는 건가?” 

   “왜, 같이 하게?”

   내가 조금 웃으며 물었다.

   “못할 거 없잖아.”

   “뭐야……. 됐어.”

   “알겠다. 그럼 다음에 봐.”

   평소답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준이는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연락이 없다.    

   파도 하나를 지나친 갈매기가 새까만 바위 위에 앉았다. 나는 일회용 숟가락을 입에 물고 핸드폰을 꺼냈다.     

   「준.」

   「응, 왜.」

   「뭐해?」

   「뭐하긴. 일요일인데 그냥 쉬지.」

   「올래?」

   「어딜?」

   「나 날개 슈퍼 앞인데.」

   「아이스크림 먹고 있냐?」

   「응.」

   「얼마나 먹었는데?」

   「(이미지가 전송되었습니다)」

   「뭐야, 거의 다 먹었잖아.」

   「니껀 니가 사 와. 어차피 너 오면 다 녹아. 올래 말래.」 


   답장 기다리고 있는데 준이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왜 갑자기 오래? 언젠 됐다더니.”

   준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넌 왜 이틀 내내 연락이 없는데.”

   “섭섭해서 그랬다, 왜.”

   “그러니까 오라구.”

   “기분 풀어 주려고 그런 거면 됐어. 그 시간 너한테 중요한 시간이잖아. 방해 안 하고 싶다.”

   “오라구.”

   “…….”

   “아, 할 얘기 있어. 와 봐.”

   “할 얘기?”

   “그래, 준비하고 후딱 와. 나 여기 있을게. 끊어.”

   얼른 전화 끊고 다시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았다. 사실 할 말 같은 건 없었다. 지금부터 머리 짜내 준비할 말 같은 것도 없다. 준이를 이곳으로 오게 할 방법이 그거밖에 없었다. 궁금한 거 못 참는 준이는 30분 뒤 내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양 옆으로 길게 찢어진 큰 눈을 뜨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다. 

   준이 말이 맞았다. 이런 날을 누구랑 같이 보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준이는 내가 이런 날을 어떻게 보내는지 너무도 잘 아는 사람 아닌가. 준이가 왜 오늘을 나와 함께 보내려는지 알 순 없지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큰일이야 나겠는가.

   어수선한 마음으로 보내는 내 오늘이 준이 마음에 짐이 될 거라 생각하고 안 만나려 했는데……. 그런 내 노파심이 오히려 준이 마음을 무겁게 했는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많이 서운했던 걸까. 무려 이틀씩이나 연락 없던 준이의 빈자리와 그 빈자리가 남긴 허전함이 나를 자꾸 찔러댔다. 네 노파심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자꾸 나를 흔들었다. 네 노파심이 오히려 준이와 네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면 어쩌려 그러느냐고 자꾸 내 속을 휘저었다.    

   시선을 다시 바다 쪽으로 옮겼을 때 아까 그 갈매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날개 슈퍼 안쪽에선 아직 바둑 중계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홈페이지 : www.parkdabin.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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