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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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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26. 2016

잘해 주래


   “재정아. 재정…….”

   어떤 여자가 내 이름 부르며 내 허릴 살살 흔들었다. 덮고 있던 이불도 걷어 갔다. 팔뚝에 찬 기운이 들었다. 뭐야, 이 한밤중에…….

   뭐가 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뜨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직 눈뜨지도 않았는데 눈알이 따가웠다. 잠든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하다. 눈알의 통증이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아주 이른 새벽이라고. 네가 일어날 시간이 절대 아니라고. 계속 눈감고 있는 게 좋을 거라고. 괜히 눈 떴다간 더 역동적인 통증을 느끼게 될 거라고.

   “재정아…….”

   이 귀찮은 여자가 다시 나를 불렀다. 계속 잠들어 있는 척하면 그냥 갈 줄 알았는데…….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내가 눈만 뜨길 기다린 누가 내 눈 속에 모래 한 줌을 홱 뿌린 것 같았다. 눈알이 뻑뻑하고 아렸다.

   침침한 시야로 숙소 풍경이 들어왔다. 눈은 금세 어둠에 적응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단체복과 술병들 그리고 온갖 자세로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 사람은 저기 신발장에서 자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났다. 아, MT. 나 MT 왔지.

   “아, 씨……. 누구야…….”

   한껏 귀찮은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날 깨워댄 여자는 창문을 등지고 있어 그림자처럼만 보였다. 체구가 작다.

   “손도경인데.”

   손도경? 4학년 손도경?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뻐근하던 눈알의 고통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손도경은 우리 과 선배다. 4학년이긴 하지만 나이가 꽤 많다고 들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최소한 스물일곱은 넘는다. 학교에서 손도경을 만나려면 중앙도서관으로 가면 된다. 중앙도서관 3층 스터디 룸. 손도경은 2년째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 스터디 룸으로 손도경을 만나러 가 본 적이 없다. 손도경도 그쪽에서 나를 만나러 와 준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손도경이 내 눈앞에 있다. 내 이름도 불렀다. 내 이름 어떻게 아는 거지? 여긴 왜 온 거야.

   “죄송합니다. 그……. 선배님이신 줄 모르고…….”

   당황스러운 몸짓으로 내가 손도경에게 사과했다. 손도경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나올래?”

   손도경이 물었다. 1학년인 제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는 곧장 신발장으로 향했다. 신발장에 엎드려 자고 있는 건 내 동기 태형이었다. 태형이를 넘어 숙소에서 제공된 슬리퍼를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갔다. 4월 밤바람은 꽤 매서웠다. 등 뒤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았다. 손도경이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현관문이 닫혔다. 

   “좀 걷자. 안 춥니?”

   발걸음 옮기다 말고 손도경이 나를 바라보았다. 손도경의 시선은 반팔 차림의 내 팔뚝과 슬리퍼 속에 든 내 맨발을 차례로 훑었다. 

   “안 춥습니다.”

   “겉옷 입고 나와.”

   “네.”    


   손도경과 나는 깜깜한 언덕길을 내려갔다. 오른쪽 위로는 우리 숙소가 보였고 왼쪽 밑으로는 밤바다가 보였다. 내가 왜 이다지도 피곤한지 생각났다. 아까 낮에 물놀이를 너무 열심히 했다. 바나나보트는 한 번만 타는 거였는데…….

   “갑자기 미안해. 너랑 얘기할 기회가 마땅히 없더라.”

   손도경이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투가 뭐 그래? 너네 아직도 기합 받고 그러니?”

   나를 마주 본 채 뒤로 걸으며 손도경이 물었다. 3학년 선배한테 태형이가 뺨 맞던 장면이 뇌리를 잠깐 스쳐 지나갔다. 태형이는 우리 동기 과 대표여서 한 달 내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아까 술도 계속 받아 마시던데. 그래서 신발장에 널브러져 자는 건가. 

   손도경은 나이도 많고 복학생이어서 학교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신입생 신고식 하던 날 손도경 얼굴 본 기억이 없다. 

   “아닙니다.”

   고갤 조금 떨어뜨리며 내가 대답했다. 손도경은 “안 믿어.” 하고 말하며 몸을 돌린 뒤 다시 앞으로 걸었다. 

   “너 우리 아빠 친구 아들이래.”

   손도경이 밤바다 쪽으로 얼굴 내밀며 말했다.

   “아, 무슨 친구요?”

   “그건 몰라. 지난 주에 아빠가 술 드시고 집에 오셔서는 니 후배 박재정이한테 잘해 주라잖아. 아빠 친구 아들이니까……. 그래서 다음 날 조교 쌤한테 박재정이 누군가 물어 봤더니 진짜 우리 과 학생이라더라. 과 사무실에서 니 사진 봤어. 넌 나 모르지?”

   “알아요.”

   “알아? 날 알아?”

   손도경이 내 쪽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복숭아 향기 같은 게 맡아졌다.

   “들었어요……. 공무원 시험 준비하신다고…….”

   “아……. 많이 아는구나. 별로 좋은 소린 못 들었겠네.”

   “왜요? 아닌데…….”

   “나이도 많은데 뒤늦게 학교 다시 와서 공무원 시험까지 준비한다고 수군대지 않니? 다들?”

   손도경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안 그러는데…….”

   양손을 휘저으며 내가 말했다. 사실 손도경의 평판이 좋지는 않다. 손도경이 방금 한 말들도 내가 들은 말들의 일부다. 손도경도 귀가 있으니 여기저기서 자기 두고 하는 말들을 듣고 다니는가 보았다. 하지만 손도경을 향한 비판은 정당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자격지심에서 나온 불평에 가까웠다. 자기가 자기 공부하고 자기 길 찾겠다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고 시기가 뭔 상관이란 말인가. 본인들은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몇몇 이들은 손도경이 자기 자릴 빼앗았다고 여겼다. 복학하고 나서 손도경이 늘 수석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내가 들어간 풋살 동아리 회장인 4학년 선배가 자기 동기인 손도경을 너무 싫어했다. 그래서 술자리 있을 때마다 손도경에 대한 이야길 들을 수 있었다. 술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동아리 회장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저마다 ‘손도경은 학교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시집이나 갔어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럴 땐 내가 1학년인 게 좋았다. 그들 대화에 섞일 필요 없으니까. 각 잡고 앉아서 적당히 눈치나 살피면 되니까.    


   “안 믿어.”

   손도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스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나는 손도경의 걸음 속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손도경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잘해 주래. 어떡하면 잘해 주는 거지?”

   손도경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요? 저한테요?”

   “응.”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신경 좀 쓰자.”

   “네?”

   “정 붙일 데가 없거든, 내가. 공무원 시험보다 학교생활이 더 어렵네.”

   손도경이 뒷짐을 지며 말했다. 뒷짐을 졌는데도 몸집이 여전히 작아 보였다.

   “그럼 잘해 주세요.”

   내가 말해 놓고 내 말에 내가 움찔 놀랐다. 마음에 없는 소린 아니었다. 아니, 내 쪽에선 좋은 거 아닌가? 잘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는 방금 내 몸을 관통하고 간 이 움찔거림의 감각을 곱씹어 봤다. 이건 마치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 말 걸 때의 느낌 같은 거다. 이 아이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나도 왕따 당하는 건 아닐까 싶은 희미한 두려움 같은 거. 손도경이 내게 잘해 주기 시작하면 우리 과 선배들이 나도 싫어하는 거 아닌가. 특히 풋살 동호회 회장…….

   “잘해 주세요.”

   우뚝 서서 멀뚱히 나를 바라보는 손도경에게 내가 다시 말했다. 

   손도경의 따스한 안식처가 돼 주고 싶어서가 아니다. 난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 과 선배들이 전혀 무섭지 않아서도 아니다. 난 그렇게 담력 있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내게 다가오는 이 사람을 막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이것 때문에 누군가 나를 떠난다면 그건 그 사람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다. 막상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겠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그 핵심을 내게 가르쳐 주셨다. 사람 오면 오는 대로 두고 가면 가는 대로 두라고. 사람 만나는 일에 힘을 빼라고. 만나고 싶은 사람 있음 잡생각 떨치고 그쪽으로 가라고. 

   왜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을까. 손도경이 아버지 친구 딸이라 그런가. 

   손도경은 표정 변화 없이 나를 계속 응시했다. 나도 손도경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도경만 내게 오고 있는 건가. 나는? 손도경에게 잘해 달라고 말하는 내 마음이 이렇게 흔쾌한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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