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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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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28. 2016

나한테 오면 돼

   갑작스러운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을까. 내 목 아래엔 파란 볼펜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볼펜 뚜껑에 파란 나일론 끈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걸 목걸이처럼 두르고 있던 것이다. 볼펜 뚜껑 맨 윗부분엔 축구공 장식이 붙어 있었다. 내 이마 위엔 하얀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다른 애들도 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날씨가 무더워 피부가 따가웠고 나는 멈춰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근처엔 음료수와 솜사탕 파는 상인들이 가판대를 열고 있었다. 분홍색 솜사탕이 먹고 싶었다.

   그 기억이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 그러고 보니 그맘때 나는 뭐든 목에 걸고 다녔구나. 볼펜도 목에 걸고 다녔고 수첩도 목에 걸고 다녔고 내 이름과 집 전화번호 각인된 은 목걸이도 목에 걸고 다녔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 나이 때 아이들은 뭔가를 챙겨 다니는 데 익숙하지 않았고 그게 정상이었다. 

   그럼 내 목은 언제부터 텅 비어 있었던 걸까. 내 목에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은 만큼 나는 내 것들을 챙기는 데 능숙해졌을까.     


   “턱을 좀 당겨 보세요.”

   사진사가 카메라 왼쪽으로 얼굴 내밀며 내게 말했다. 사진사의 왼쪽 눈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나는 조그맣게 헛기침하며 턱을 목 쪽으로 얼마간 당겨 보였다. 평소 내 앉은 자세가 비뚤어져 있는 건가? 증명사진 찍으러 올 때마다 턱 당기란 소릴 듣는 것 같다. 아니면 증명사진 찍을 땐 모두 턱을 평소보다 당기는 게 규칙인 건가.

   만족스런 얼굴이 된 사진사가 다시 카메라 뒤로 사라졌다. 턱 당기느라 뻣뻣해진 뒷목 근육을 느끼며 나는 다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찰칵. 새하얀 플래시가 터지며 내 증명사진이 찍혔다. 찰칵. 찰칵.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할 이 사진 속 자세는 원래 내 것이 아닌데. 하기야 나를 알려야 하는 자리에 설 때마다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인 척했다. 진짜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인 척, 좀 더 똑똑한 사람인 척, 좀 더 유능한 사람인 척…….

   “다 됐습니다. 나오세요.”

   사진사가 촬영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시 턱을 앞으로 내밀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 몸의 자세가 평소대로 되돌아왔다. 촬영실 내부의 기계 냄새를 느끼며 잠시 앉아 있었다. 사방이 새하얀 촬영실이 내 머릿속도 하얗게 만들었다. 누군가 촬영실 문 앞을 기웃거렸다. 새로운 손님인가.

   촬영실 밖으로 나와 가죽 의자에 앉았다. 증명사진이 포장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사진 값을 지불해야 하기에 가방을 뒤적거렸다. 손에 편지봉투 몇 장이 만져졌다. 내일 접수하기로 한 이력서 담긴 봉투들이다. 아직 증명사진 붙지 않아 미완성인 이력서 네 장…….

   어려서 차고 다니던 볼펜 목걸이가 왜 생각났는지 이제 알 것 같다. 그땐 가진 것들을 목에 걸고 다녔기에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목에 걸고 다니지 않아 나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잃어버린 볼펜과 샤프가 몇 자루며 수첩과 노트는 또 몇 권인가. 어디 그뿐이랴. 잃어버려선 안 되는 것들마저 수시로 잃어버렸다. 이를테면 꿈이나 희열이나 감동 같은 것들. 스무 살 무렵부터는 거울 보는 게 두려웠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감격 같은 걸 내 얼굴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난 그저 세상 기준에 맞춰 남들이 흉 안 볼 만큼만 살아가려 애쓸 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화가가 되겠단 내 말에 아빠가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말해 보라고. 너 이담에 뭐할래?”라 했을 때부터였을까. 

   무의식중에 목을 만져 보았다. 언젠가 수많은 것들을 걸고 다녔던 목덜미를 쓰다듬어 보았다. 수많은 것들을 지키고 있었던 목 안쪽도 매만져 보았다. 차가운 손끝이 닿자 살갗들이 조금조금 움츠러들었다. 벌려진 가방 속 이력서 봉투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각각 기업이 원하는 모습으로 위조된 내 흔적들 적힌 저 봉투들을.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손은빈님!”

   카운터 쪽에서 사진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가죽 의자에서 일어선 내가 모퉁이를 꺾어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사진사의 왼쪽 눈은 여전히 붉었다. 일요일인데 늦잠도 못 자고 출근한 걸까. 사진사는 건조한 말투로 증명사진 가격을 불렀다.

   신용카드를 내밀고 결제를 기다리는 동안 카운터 밑에 있는 사진들을 구경했다. 면접 용 증명사진이 태반이었다. 사진들 밑에는 ‘면접 용 정장 무료로 빌려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들은 이 사진관에서 정장 빌려 입는 대가로 자신의 얼굴을 사진관 한편에 전시하도록 허락한 것이겠다. 똑같은 정장을 입고 똑같은 포즈를 취한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신용카드를 받아들자마자 사진관을 벗어났다. 등 뒤에서 사진사가 “손님, 영수증…….”이라고 우물거렸다.   


   “집 앞이에요. 잠시만 내려와요. 나 1층 현관에 있는데.”

   수화기에 대고 내가 말했다. 그는 “지금 내려갈게.” 하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내 목소리와 표정 변화를 기막히게 판별해 내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그에겐 구구절절 뭔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말 안 해도 티 안 내도 다 아니까. 내가 어떤지 나보다 먼저 알아채니까.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건 엄청난 축복임을 알고 있다. 선물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축복이란 표정으로도 다 차오르지 않는 그런 것이다. 이 사람은 내게. 

   그래서 나는 세상을 미워할 수가 없다. 세상이 미워지려는 날마다 그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 세상이 공평하다는 걸 그로 인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불행만을 전달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나를 붙잡고 물었다. 그가 얼굴을 뒤로 좀 물리고 내 얼굴과 옷차림과 눈빛을 점검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나온 뜨끈한 체온이 내 양 팔뚝에 전해졌다. 정말 전화 끊자마자 나온 건지 그는 얇은 반팔 옷만 입고 있었다.

   “안아 주세요.”

   내 말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나를 안아 주었다. 그는 숨을 조심해서 쉬고 있었다. 나를 너무 꽉 안지도 않았다. 그의 호흡과 손 그리고 가슴팍으로부터 나오는 떨림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까부터 정신없이 흩어져 있던 마음이 다시 모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울적하던 마음에 다시 빛이 들고 온기가 돌았다. 바로 집에 갔음 어쩔 뻔했나, 싶다. 이리로 오길 잘했다.

   그가 몸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은 무슨 일이냐고 안 묻고 싶은데. 어때. 나 어떡할까. 물을까?”

   그가 오른쪽으로 고갤 조금 꺾으며 물었다. 

   “아뇨…….”

   “너 데리고 가고 싶은 곳 있는데 같이 가 줄래?”

   그가 다시 물었다. 내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 그는 항상 내게 질문한다. 스스로 뭔가를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내게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나는 어떡하고 싶은지 계속 묻는다. 그리고 내 대답을 최대한 존중해 주고 따라 준다.

   이런 것들을 그는 어떻게 척척 익히고 있는 걸까.     


   운전하는 내내 그는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앞만 보았다. 

   “살면서요.”

   내가 입을 열었다.

   “응.”

   그가 재빨리 대답했다.

   “내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면……. 그래서 갑자기 너무 허무하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까 막막하기도 하고……. 그럼 어떡해요?”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사이드미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갓길에 차를 대 놓았다. 그가 안전벨트를 풀고 나를 돌아보았다.

   “살다가 뭔가를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래서 갑자기 너무 허무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막막하고. 그럼 어떡하냐고?”

   아까 내가 한 말을 반복하며 그가 내게 물었다.

   “뭔가를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모든 걸 처음부터요…….”

   내가 대답했다. 그는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묻고 팔짱을 꼈다. 

   “오늘처럼 나한테 오면 돼.”

   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네?”

   “그런 날 생기면 오늘처럼 나한테 와. 다 초기화시키고 백지 상태로 돌아가야 할 때 나한테 와. 먼저 들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리로 가도 돼. 근데 나한테도 와. 내가 너한테 답은 못 줘도 나 참을성 되게 좋아. 특히 너랑 관련해서는 참을성 무지 좋아. 알잖아. 니가 백지 상태 돼서 허무하고 막막하기만 할 때……. 나 그런 너 못 견뎌서 같이 허덕거리고 그러지 않는다고. 물론 속상하고 맘 쓰이겠지. 그래도 니가 그런다고 해서 내가 힘겨워지고 그런 건 전혀 없어. 난 오히려 그런 때 니가 나 찾아준다면 행복할 거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거든. 사랑할수록 도움 청하기 어려운 거 사실이잖아. 짐 될까 봐. 특히 너한테는 더 그렇잖아. 아유……. 잘 정리해서 말하고 싶은데 횡설수설하네……. 아무튼 오늘 잘 왔어. 앞으로 무슨 일 생기면 오늘처럼만 해.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그거밖에 없다. 일단 니가 나한테 와야 내가 뭘 할 거 아니야.”

   그가 콧등을 한 번 찡긋거리곤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꺼졌던 히터 바람이 다시 나오고 조수석 등받이도 따뜻해졌다.

   품 안에 있는 가방 안쪽엔 여전히 새하얀 편지봉투 네 개가 들어 있다. 그 옆엔 방금 찍어 낸 증명사진 한 봉지도 들어 있다. 오늘 밤 집으로 돌아가 내 이력서들을 완성할 수도 있고 완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아침까지 나는 ‘내 이력서들을 완성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내 삶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내게 선택권이 생겼다. 뭐든지 그렇게 해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 선택권은 언제나 내게 있어 왔지만 그걸 행사해 본 적은 없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급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던 그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내겐 삶의 선택권이 있다는 걸. 

   어째서 그를 마주치자마자 그걸 깨달을 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걸 알 수 있었다면 사랑이 뭐라고 정확히 정의할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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