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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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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30. 2016

고마운 사람

   “선생님!”

   처음 보는 여자가 나를 불렀다. 너무 반갑게. 아니, 날 부른 게 맞나? 내게 정면으로 꽂힌 여자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철역이고 사람도 많으니 여자가 부르는 선생님이 내가 아닐 수도 있었다. 비록 방금 전까지 여자의 눈길이 너무 확고하게 나를 가리켰다 해도.

   “아, 선생님!”

   여자는 들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를 본격적으로 불러댔다. 나는 눈만 둥그렇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 선생님 소릴 듣는 거지? 

   “저 기억 안 나세요? 저 명진이잖아요!”

   여자가 자기 이름을 말했다. 명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 같은데. 해선 안 될 상상이긴 하지만 여자가 잠깐 범죄 패거리 중 한 명으로 보였다. 여자는 귀염성 있는 얼굴과 흔한 이름으로 나를 꼬드긴 뒤 덩치 큰 사내들과 합류해 나를 시커먼 승용차에 처박게 하는 거다. 그리곤 두툼한 지폐 다발을 수고비로 건네받는 거다. 나는 시커먼 승용차 안에서 독약에 취해 잠들어 있다가 어디론지 사라지는 거고.

   내 본능이 나를 뒤로 한 발 물러서게 했다.

   “죄송합니다. 모르는 이름이네요.”

   여자와 눈 마주치지 않은 채로 내가 길을 비켰다. 여자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정명희 선생님 아니에요?”

   여자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빙고. 빙고? 

   “어?”

   여자로부터 멀찌감치 비껴서 있던 내가 여자에게 불쑥 다가섰다.

   “아니에요?”

   여자가 다시 물었다.

   “맞는데요. 누구세요?”

   내가 되묻자 여자의 표정이 다시 처음처럼 돌아왔다. 나는 여자를 따라 웃지 못했다. 등짝이 다 화끈거렸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생소한 사람이 내 이름과 내 얼굴을 알고 있다니. 마치 누군가 내 인생을 훔쳐 산 것 같았다. 그 누군가 내 인생을 훔쳐 사는 동안 내 몸뚱이와 저 여자가 만난 것이리라. 우리가 만나서 뭘 했길래 저 여자가 날 보며 이렇게 반가워하는 거지?

   “검륜 초등학교.”

   여자가 퀴즈 내듯 말했다. 나는 고갤 저었다.

   “김호재.”

   여자가 힌트 하나를 더 줬다.

   “호재 알죠. 내 사촌동생인데. 그럼 그쪽은…….”

   “호재 친구예요!”

   이제 내가 모든 걸 이해하리라고 생각한 여자가 더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여전히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친동생도 아니고 사촌동생 친군데 여자가 날 어떻게 알고 있으며 날 왜 선생님이라 부르는 거지?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여자가 날 쏘아보는 시늉 하며 물었다.

   “자세히 좀 얘기해 봐요.”

   난처한 기색으로 내가 청했다.

   “바쁘세요? 차 한 잔 하면 좋겠는데……. 드릴 말씀도 있고…….”

   여자가 가느다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일단 밖으로 나가죠.”    


   여자와 내가 들어온 곳은 지하철역 출구 바로 옆에 있는 빵집이었다. 카페가 길 건너에 있어 그냥 이 빵집으로 들어온 거였다. 내게 빨리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여자 마음도 급했지만 뭐가 뭔지 듣고자 하는 내 마음도 그 못지않게 급했다.

   버터 냄새와 계란 익는 냄새 그리고 잘 구워진 빵 껍질 냄새가 속을 휘저었다. 여자는 나를 첨 만났을 때처럼 명랑한 얼굴과 목소리로 빵과 커피를 주문했다. 내가 지갑을 꺼내자 엄숙한 표정까지 지으며 여자는 나를 말렸다. 

   “선생님.”

   테이블 너머에서 여자가 나를 나긋나긋 불렀다.

   “제가 선생님인가요?”

   “네.”

   “저를 만나신 적이 있나요?”

   “그럼요!”

   “언제요? 어디서요?”

   내 물음에 여자는 손바닥을 펼쳐 연도를 세기 시작했다.

   “12년 전이요. 검륜 초등학교에서.”

   “제가 뭘 하고 있던가요?”

   “호재랑 운동하고 있었어요. 줄넘기.”

   여자가 양손으로 줄넘기하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

   기억났다.

   “이제 저 아시겠어요?”

   여자의 물음에 나는 고갤 끄덕거렸다. 그제야 여자를 환영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12년 전, 나는 이모 집에 잠시 얹혀살았다. 멀쩡한 우리 집 놔두고 이모 집 들어가 살게 된 건 회사 일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두 지역에 걸쳐 건물을 하나씩 두고 있었다. 하나는 우리 집 근처에, 하나는 이모 집 근처에. 이모 집 근처 쪽 회사 사람 하나가 갑자기 관두는 바람에 일손이 모자랐다. 그 일손 채우러 발령 온 사람이 나였다. 

   내 발령 기간은 딱 두 달이었다. 출장 개념으로. 그런데 딱 두 달만 살 수 있는 집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차에 이모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줬다. 아마 엄마가 이모에게 부탁했으리라. 

   누군가의 집에 얹혀살아 본 게 처음이었던 나는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방값을 내겠다고 했더니 이모와 이모부가 동시에 화를 냈다. 그래서 나는 호재 공부도 봐 주고 호재랑 같이 운동을 다녔다. 그렇게나마 이모 네 식구들 호의에 보답하고 싶었다.

   명진이를 만난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주말 오후에 멀뚱히 자리 차지하고 있기 좀 그랬던 나는 호재를 데리고 이모 집 앞 초등학교로 향했다. 4학년 체육 수행평가가 줄넘기였고 호재는 줄넘기에 서툴렀다. 우리는 운동장 한편에서 연두색 줄넘기를 열심히 넘었다.

   호재 머리카락이 땀에 젖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호재가 누군가를 불렀고 그게 명진이었다. 명진이도 월요일에 있을 줄넘기 수행평가를 준비하러 운동장을 찾은 거였다. 명진이는 혼자였다. 호재가 내게 명진이도 같이 줄넘기 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안 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둘이었던 우린 셋이 되어서 열심히 줄을 넘었다.

   운동이 나를 각성 상태로 만들어서 그런 건지 뭔지……. 집에서 나올 때와 달리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그래서 호재와 명진이에게 온갖 이야기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훈계에 가까운 이야기였을 거다. 나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을 그 애들한테 하고 있었을 거다.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하는 거야…….

   그뿐이다. 그때 명진이는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근데 왜 지금은 난데없이 선생님인가?    


   “선생님이라니…….”

   의아한 얼굴로 내가 명진이에게 물었다. 포크 두 개 들고 크림빵을 찢고 있던 명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 뽀얗고 조그맣던 아이는 이제 어엿한 스물셋의 여자가 되어 있다. 명진이의 몸 구석구석에서 온통 화사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명진이는 내가 명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대가 되어 있고 나는 그 당시 이모의 나이대가 되어 있다. 아마 그때 이모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지금 내가 명진이를 바라보고 있으리라. 한때 나 자신도 그 터지게 붉은 젊음을 가져 봤단 사실이 약간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선생님이죠!”

   “어째서요?”

   “저한테 그런 얘기해 주는 사람 선생님이 처음이었거든요. 물론 그 뒤로도 없었구요.”

   포크를 놓으며 명진이가 말했다.

   “그런 얘기요?”

   “네. 살아가는 얘기요.”

   “헛소리나 잔뜩 늘어놨을 텐데…….”

   “전혀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때 새겨들은 얘기들이 제 인생에 얼마나 도움 많이 됐는데요…….”

   명진이가 말끝에 손사래를 쳤다. 애송이 시절의 내가 쏟아낸 잔소리가 한 아이 인생에 보탬 돼 봐야 얼마나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명진이는 12년 세월을 뚫고 나를 찾아내 내 이름을 불렀다. 딱 하루 잠깐 만났을 뿐인 내게 명진이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뭘까. 정말 내가 떠들어댄 말들이 명진이 인생에 뭔가를 해냈단 말인가. 그래서 명진이가 내 이름 세 글자를 여태 기억한 것인가. 지하철역의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 이미 많이 늙어 버린 내 얼굴을 단박에 찾아낼 수 있었던 건가.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내게 걸어와 나를 불러 세울 수 있었던 건가.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명진 씨한테…….”

   “명진이라고 해 주세요.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내가 명진이 너한테…….”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명진이가 양손을 쭉 내밀어 내 말을 잘랐다.

   “많은 걸 해 줬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믿으시든 믿지 않으시든 그 사실 변함없는 거예요. 저 이제 많이 컸어요, 선생님. 누가 저한테 도움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똑바로 구분할 수 있어요. 선생님. 원래 고마운 일은요……. 고마움 느끼는 사람이 더 정확하게 아는 거래요. 그래서 누가 고맙다고 하면 그게 정말 고마울 일인 거래요. 베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 베풂에 고마워 하는 사람 있으면 그거 고마운 일인 거래요. 감사해요, 선생님.”

   명진이 앉은 채로 고갤 약간 숙이며 말했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어물어물대고만 있었다. 명진이 싱그럽게 웃으며 다시 포크를 쥐었다. 명진이 빵 찢는 소리가 조용한 빵집에 울렸다.     




도서 안내 및 문의 : www.parkdabin.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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