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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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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an 06. 2017

우리가 부족해서,
누가 나빠서 헤어진 게 아니라

서로의 온도에 미처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야



   8월 말, 여름 기운이 꺾이지 않아 아직은 따가운 햇살이 성진 빌딩의 수많은 유리창으로 스민다. 유리창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 회사원은 이 유리창들에 모이는 태양열을 모아 자원으로 만들면 전기 걱정이 없겠다고 잠시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기술이 이미 개발돼 어느 곳에서는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점심시간 임박이라 볕이 한층 거세어졌다. 더 벗을 옷이 없어 난처한 얼굴이 된 철민이 성진 빌딩 로비로 들어선다. 철민이 입고 있는 진한 하늘색 반팔 셔츠 등이 땀으로 둥글게 얼룩져 있다. 2주일 동안 지방으로 출장 가 있다가 돌아와 본사로 복귀하는 첫 날이다.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는 철민의 본사 사무실은 13층이다. 

   로비를 가로질러 걸으며 철민은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본다. 얼마 전 40대에 접어든 철민의 머리카락에서 이제 새치가 희끗희끗 보인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탓에 30대 때부터 철민을 40대나 50대로 보는 사람이 많긴 했지만……. 

   엘리베이터 근처에 꽤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13층으로 바로 올라갈 거였으면 그 사람들 틈에 끼겠지만, 지금 철민의 목적지는 13층이 아니라 지하 1층이다. 

   고작 지하 1층 가자고 엘리베이터 앞에 늘어진 줄을 서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땀 냄새나 맡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철민은 오른쪽으로 걸음을 돌려 비상구 쪽으로 향한다.    





   성진 빌딩은 30층 건물이다(지하까지 합하면 34층이다). 이 거대한 건물에는 업종이 다양한 23개의 회사들이 들어서 있다. 철민의 목적지인 지하 1층은 생활 시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편의점, 카페, 빵집, 우동 가게, 도시락 가게, 생활 용품과 문구 용품을 값싸게 파는 매장, 세탁소……. 철민의 걸음이 멈춘 곳은 나무로 만든 간판이 내걸린 우동 가게 앞이다. 가다랑어 포 냄새가 철민의 코끝을 스친다.

   원래 철민의 복귀 날짜는 내일이다. 그런데 철민이 제출해야 하는 결재 서류는 오늘까지가 마감일이다. 복귀 날짜와 서류 제출 날짜가 다른 이유는 철민도 모른다. 어쨌든 오늘 내로만 서류를 제출하면 되는 거라, 철민은 느긋하게 점심 식사나 하기로 했다. 2주 간의 출장 때문이 아니라 혼자 사는 철민의 집에는 언제나 식재료가 부족하고, 식재료가 준비돼 있다고 해 봐야 라면이나 햄 종류뿐이라, 철민은 기왕 회사 들르는 김에 식사까지 해결하려 한 것이다. 

   우동 가게 안으로 들어선 철민이 구석 자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구석 자리는 항상 비어 있다. 또 왜인지 모르겠지만 철민은 항상 그 자리에 앉아 느린 동작으로 우동을 먹는다. 큼직한 새우튀김이 올라간 튀김 우동을. 제법 출출한 날에는 치즈가 듬뿍 들어간, 주먹만 한 고구마 크로켓croquette도 같이 먹는다. 철민이 식당에서 메뉴 고르는 순서는 딱 한 가지다. 튀기든지, 굽든지, 하여간 기름에 풍덩 빠졌다 나온 게 무조건 첫 순위다.     


   “이 과장님!”

   누군가 철민의 손목을 붙잡고 철민을 불렀다. 무심히 걷고 있던 철민이 약간 놀란 기색으로 멈춰 선다. 

철민을 불러 세운 건 승환이다. 승환은 이 건물 12층에 위치한 통신 회사 직원이다. 12층은 승환의 통신 회사와 보험 회사 그리고 휴게실로 이뤄져 있다. 그 휴게실에는 흡연실이 있고 철민과 승환은 그곳에서 만났다. 라이터를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철민은 승환에게 담뱃불을 몇 번 빌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승환이 철민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거나 라이터를 빌려 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점점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보통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라 할 수는 없지만, 우연히 만나면 식사를 같이 하거나 담배를 같이 태우거나 할 수 있는 사이 정도는 된다. 

   통신 회사 직원이라 고객 문의 전화를 하루 종일 받을 텐데도 승환은 누군가를 만나 얘기 나누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출장 체질이라 사무실 생활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철민은 휴게실에서 승환의 얘기를 듣는 걸로 약간의 활기를 얻곤 했다. 30대 중반인 승환은 작년 가을에 결혼했고 지금 승환의 아내는 딸아이를 임신 중이다.    





   “오늘은 식사 일찍 하네?”

   승환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철민이 물었다. 

   “이따가 무슨 회의 한다고 해서요. 다들 도시락 시켜 먹는다고 하는데 저는 차가운 밥 먹기 싫어서……. 아침 식사 걸러서 배도 고프구요. 그래서 후딱 내려와서 허겁지겁 먹고 있어요. 이 과장님도 아시죠? 저희 팀 회의 한 번 시작하면 끝도 없는 거. 도시락 같은 거 먹어서는 못 배겨내요.”

   눈을 가볍게 감고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승환이 말했다. 철민은 조금 웃으며 테이블 구석에 세워진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근데 이 과장님은 출장 다녀오셨어요? 며칠 안 보이시던데…….”

   승환이 철민에게 물었다.

   “아, 응……. 이번엔 지방으로 다녀왔어. 거긴 아랫동네라 그런지 진짜 덥더라고.”

   대답 끝에 철민은 종업원을 불러 튀김 우동과 고구마 크로켓 두 개를 주문했다. 고구마 크로켓 하나는 승환의 몫으로 시킨 것이다. 

   “이 과장님 더위 잘 안 타시지 않아요? 2년 전인가, 그때는 아랍 쪽으로 출장도 다녀오셨잖아요.”

   “두바이. 두바이……. 내가 더위를 잘 안 탄다고? 이 사람아, 이 땀 안 보여?”

   “그럼 두바이 갔을 땐 어떡하셨어요? 용케 살아 돌아오셨네.”

   승환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 돌아온 거야. 거기서는 일하는 것보다 생존하는 게 더 문제였으니까……. 더워도 오죽 더워야지……. 근데 거기 사람들은 참 대단하더라고.”  

   “왜요?”

   “출장 사흘 째였나? 아마 그랬을 거야. 아침에 호텔 식당에서 밥 먹고 있었거든. 벽걸이 TV에 틀어 주는 뉴스 보면서 말이야. 뉴스 캐스터 말을 내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날씨 정보 적힌 전광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지. 그 날 기온이 34도까지 오를 거라 하더라고.”

   “34도요?”

   승환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그래, 34도. 나는 한숨 푹푹 내쉬면서 또 한바탕 땀 흘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어. 근데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현지인들이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처럼 자기들끼리 막 웃더라고. 그때 통역사가 식사하러 왔길래 내가 물어 봤어. 저 사람들 왜 웃느냐고. 그랬더니 통역사가 뭐라는 줄 알아?”

   “뭐라던데요?”

   “모처럼 시원한 날씨라고 저들끼리 작은 축하를 나누고 있다는 거야. 내 참……. 승환 씨는 믿겠어? 34도가 시원한 날씨라니. 내가 못 미더워 하는 표정 짓고 있으니까 통역사가 말해 주더군. 두바이는 여름 최고 기온이 50도까지 올라간대. 50도라니, 사람이 살 수 있는 온도인가? 나는 뭐라 대꾸도 못하고 입만 쩍 벌리고 있었어. 통역사는 내 반응이 웃긴지 아주 껄껄 넘어가더라고. 아무튼 그 날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땀을 많이 흘렸어. 오줌으로 나오는 수분보다 땀으로 나오는 수분이 더 많았을 거야. 거기 사람들한테는 쾌적한 날씨였겠지만 34도의 날씨가 나한테는 불지옥이었지. 근데 새삼스럽게 신기하더라고. 그 사람들이나 나나 크게 다를 것 없는 신체 구조를 갖고 있는데 말이야. 더위를 견디는 능력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 버리잖아. 그래서 나는 꼭 우리가 다른 종족인 것 같더라고. 아무리 똑같은 사람이어도 살아가는 환경이 크게 다르면, 서로 다른 종족이기라도 한 것처럼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별안간 참 낯설더군. 나는 땀 때문에 옷이 다 젖어서 축축한 행주 꼴이 됐는데, 내 옆에서 어떤 젊은 여자는 김 풀풀 나는 뜨거운 커피를 맛있게 마시더라고.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그 여자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도 여기서 한 10년 살다 보면 낮 기온 34도인 날에 뜨거운 국물 한 사발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모든 게 적응의 문제니까 말이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거기서 계속 살다 보면 나는 그 미친 듯한 더위에 적응을 했을 거라고.”

   “뭐, 그렇겠죠.”  

   “그 생각을 하고 났더니 사람 사귀는 일이 새롭게 보이더군.” 

   “사람 사귀는 일이요?”

   “그래, 사람 사귀는 일. 어떤 사람이랑 내가 잘 어울려 지낼 수 없을 때 난 항상 그 사람 탓 아니면 내 탓을 했어. 주로 상대 탓을 했지. 서로 어긋나는 데는 뭔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이유라는 건 상대의 모자람이나 잘못일 거라 확신했지. 근데 두바이에 있는 동안 그 확신이 깨져 버렸어. 산산이 깨져 버렸어. 내가 맺고 있던 관계가 계속 비틀리고 그 관계에서 내가 자꾸 숨이 막히는 건, 아직 내가 그 사람 환경에 적응을 덜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그 사람하고 나 사이의 환경 차이가 다른 사람들하고 나 사이의 환경 차이보다 유난히 컸던 거지. 그래서 그 사람하고의 관계는 그렇게 내내 버거웠던 거야. 사막에 살던 사람이 북극 추위에 적응하는 데 긴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쏟아야 했던 거야. 단순히 적응 문제였던 거야. 그래서 거기에는 아무런 모자람도 잘못도 없었던 거야. 남들보다 더위나 추위를 많이 타는 게 그 사람 결함이나 그 사람 허물이 아닌 것처럼…….”

   철민은 말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승환은 들고 있던 까만 젓가락을 우동 그릇 속에 찔러 넣고 철민을 가만히 바라본다. 승환은 철민이 10년 전에 이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자식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고, 아니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철민은 지금 자신의 옛 가정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후회하는 중일까. 

   적응. 적응이라…….

   승환은 철민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든다. 승환에게 어떤 대답을 바라고 철민이 그런 얘길 한 건 아니었을 거라고 여긴 까닭이다. 사실 뭔가 대답을 해 주려 해도 승환 쪽에서는 딱히 해 줄 말이 없다.

   철민은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해 버렸나.’ 하고 생각하며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한 쌍 꺼내 든다. 승환이 어금니로 단무지 씹는 소리를 들으며 철민은 주방 쪽을 건너다본다. 

   철민의 등 뒤에서 가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손님 들어오는 발소리가 난다. 못해도 두 사람 이상의 발소리다. 우동 가게 주인이 “어서 오세요!” 하고 외친다.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물기 있는 식재료가 올라가며 ‘치익’ 하는 소리가 터져 오른다.

   “그래서 출장 가신 동안에 맛있는 건 많이 드셨어요?”

   양쪽 눈썹을 위쪽으로 훌쩍 치켜들며 승환이 철민에게 물었다. 철민은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린 뒤 “거기가 글쎄…….” 하고 운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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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희망의 종류는 많지만, 가장 믿을 만한 희망은 늘 하나였다. 이곳에 오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쭉 있을 거란 따뜻한 예감을 주는 것(또는 사람)들.

-산문집『커피 한 잔 해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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