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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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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Dec 26. 2016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야

우리일 땐 우리만 생각하는 거



   활짝 열린 베란다 너머에서 가을볕이 흠뻑 쏟아져 내리고 있다. 거실이 어두운 까닭에 볕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인다. 볕은 아주 정확히 토막 낸 사과 맛 젤리 같이 생겼다. 베란다 창틀 모양으로 잘린 채 밀려든 그 뿌연 볕은 거실 바닥을 부지런히 데우고 있다. 바닥에 깔린 고무 장판이 볕을 받아 반들거린다. 이맘때쯤이면 탐스럽게 익어 수확을 기다리는 들판의 곡식들처럼, 가을 햇살도 풍성한 황금빛으로 넘실거린다. 

   햇살에도 제철이 있다면 햇살의 제철은 가을일 것이다. 적어도 소율은 그렇게 생각한다.

   베란다에서 거실로 되돌아오던 소율이 거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힐끔 올려다본다. 오후 1시 29분. 이제 정훈이 오기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정훈이 소율의 집으로 오겠다고 한 지는 15분쯤 지났다.

   집으로 올 거면 최소한 1시간 전에는 말해 달라니까…….

   소율은 아직 잠옷 차림이다. 밀린 설거지를 후딱 해치우고, 화장실을 간단히 청소하고, 온 집 안에 널려 있던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나니 지금이다.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들어간 소율이 머리 끈을 풀고 세면대 수도꼭지를 올린다. 가지런한 단발머리가 소율의 목덜미를 덮는다. 손목에 채워진 머리 끈에 새까만 머리카락 몇 올이 감겨 있다.

   집 앞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시켜 먹을 생각이었는데……. 소율은 난데없이 손님을 치르게 생겼다. 그것도 그냥 손님이 아니라 정훈이다. 정훈은 4년 3개월 동안 소율과 교제해 온 사람이다. 중간에 헤어지지도 않고 4년 넘게 만났지만 여전히 소율을 긴장시키고 준비시키는 사람.    





   소율이 잠옷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소율은 빨간 면 티셔츠에 한쪽 팔을 마저 넣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굴과 머리 모양을 빠르게 점검한 소율이 현관 앞으로 뛰어갔다. 소율이 현관문 도어록door-lock을 해제했다. 잠금장치가 풀리자마자 정훈이 현관문을 열었다. 정훈은 남색 니트에 검은색 모직 코트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정훈의 왼손에 납작한 초록색 상자 하나가 들려 있다. 

   현관으로 들어서던 정훈이 그 상자를 소율에게 내민다.

   “이거.”

   약간 잠긴 목소리로 정훈이 우물거렸다. 하루 종일 한 마디도 안 한 건가. 정훈은 하얀 운동화와 야구 모자를 동시에 벗으며 소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율은 “뭐야?” 하고 상자를 받아든 뒤 상자의 무게를 재 보려는 듯 상자를 살짝 흔든다. 상자 속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어, 이거 세게 흔들면 안 돼.”

   정훈이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리며 주의를 주었다. 깜짝 놀란 얼굴이 된 소율이 “뭔데?” 하고 다시 묻는다. 

   “쿠키. 우리 이거 지금 먹자.”

   말끝에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며 정훈이 거실로 올라선다. 그러고 보니 상자에서 고소한 냄새 같은 게 나는 것도 같다. 

   소율은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린다. 정훈은 2인용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정훈의 뒤통수에 모자 자국이 나 있다. 


   소율은 찬장에서 큼지막한 머그잔 두 개를 꺼낸다. 빨간색과 초록색. 이 머그잔들은 정훈이 집들이 선물로 사다 준 것이다. 정훈은 소율의 집들이 선물로 머그잔 두 개와 파스타 접시 두 개를 사 왔다. 소율은 정훈이 자신의 집에 올 때만 그것들을 식탁에 꺼내 놓았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는 그 잔과 접시를 내놓은 적이 없다. 그것은 소율만의 규칙이었고 그 규칙은 소율에게 은은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찬장 속에 보관돼 있는 그 머그잔들과 접시들을 혼자서 쳐다볼 때마다, 소율은 마음 한편이 따스해 오는 걸 느꼈다. 그것들 속에 정훈의 존재 일부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소율은 꽤 공을 들여 커피를 내린다. 자욱한 커피 향기가 소율의 등 뒤로 퍼져 나간다.    





   “웬 쿠키야?”

   김 폴폴 나는 커피 두 잔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소율이 물었다. 상자는 아직 개봉되지 않은 채 식탁 한편에 놓여 있다. 정훈은 초록색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쥔다. 소율은 조심스런 손길로 상자를 열어 본다.

   상자 속에는 하얀 종이 호일이 반듯하게 깔려 있고 그 위로 둥근 모양의 쿠키들이 소복이 들어 있다. 테두리가 조금씩 바스러진 쿠키들도 보인다. 어렴풋하던 쿠키 냄새가 확연해진다. 버터 쿠키다. 

   “어? 비닐로 포장 돼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담겨 있네. 설마 직접 만든 건 아니지?”

   고갤 살짝 들고 소율이 정훈에게 물었다.

   “너 설마라는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누가 그러던데, 설마라는 말은 신을 부르는 주문이래. 그래서 ‘설마 그러겠어?’ 하는 일들이 막 실제로 일어나고 그러는 거야.”

   정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한 거냐구, 아니냐구…….”

   “내가 한 거야.”

   “거짓말.”

   눈을 가늘게 뜨고 정훈을 곁눈질하며 소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훈이 웃음을 터뜨린다. 소율은 알고 있다. 정훈의 인생에 요리라는 과목은 개설된 적이 없다는 걸. 정훈은 그런 쪽에 관심이 아예 없다. 

   “진짜야. 내가 한 거야.”

   웃음을 추스른 정훈이 소율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덤덤히 말했다. 소율은 정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농담하고 있는 표정은 아닌데……. 농담할 때마다 정훈의 왼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데 지금 정훈의 입꼬리는 제자리에 있다. 

   “진짜야? 진짜 니가 이거 만들었어?”

   “응, 전부는 아니지만.”

   “응? 그게 무슨 소린데?”

   “내가 밀가루도 잘못 사고……. 전부 망쳐 버려서……. 누나 불렀어. 누나가 도와줬어.”

   정훈은 어제 자신을 노려보던 친누나 얼굴을 잠시 떠올린다.

   “밀가루 얼마나 버렸는데?”

   의자에 앉으며 소율이 물었다. 정훈이 왼손 손가락 두 개를 펼친다.

   “두 봉지?”

   “2kg.”

   “2kg? 2kg?”

   “처음에 반죽을 너무 많이 했어. 나는 내가 한 번에 성공할 줄 알았지. 인터넷 보니까 레시피도 딱딱 나와 있길래……. 근데 내가 산 밀가루가 쿠키 만드는 밀가루가 아니고 무슨 칼국수 그런 거 만드는 밀가루래. 난 몰랐지. 밀가루에도 종류가 있더라니까? 너는 알았어? 밀가루에 종류 있는 거?”

   잔뜩 심각해진 얼굴로 정훈이 물어 오자 소율이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웃는다. 못 말려, 진짜.

   “너 레시피 봤다며. 거기 밀가루 종류 적혀 있잖아.”

   “그래, 다시 보니까 박력분이라고 적혀 있더라. 아무튼 먹어 봐. 맛있어. 사실 누나가 거의 다 만든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먹어도 돼.”

   말을 마친 정훈이 상자에서 쿠키를 골라 소율에게 내민다. 깨진 데 없이 말쑥한 모양의 쿠키다. 소율이 그 쿠키를 손으로 집으려 하자 정훈이 고갤 흔들며 “아, 해 봐. 먹여 줄래.” 하고 말한다. 소율이 싱긋 웃으며 쿠키를 받아먹는다.





   “감동이다. 근데 나 불안해.”

   소율이 쿠키를 씹으며 우물거렸다.

   “어? 불안해? 뭐가?”

   상자 쪽으로 손을 뻗다 만 정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 이렇게 나한테 잘해 주다가 나중에 나한테 싫증난다고 나 떠나 버리면 어떡해? 너 아니면 나는 아무도 눈에 안 들어올 거 같은데. 너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면 나는 어떡해. 니가 이러면 내가 널 어떻게 잊어, 이 나쁜 놈아.”

   “그런 걱정을 왜 니가 해. 니가 나한테 얼마나 과분한 사람인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들뿐이라 나는 얼마나 미안한데.”

   정훈이 눈길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소율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이러려고 꺼낸 얘기가 아닌데……. 소율이 정훈의 오른손을 찾아 쥐고 살짝 흔든다. 정훈의 손가락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다. 정훈을 잠깐 흘겨보던 소율이 입을 연다.

   “또 그런다, 또. 그 소리 좀 그만해.”    


   소율과 정훈은 고시원에서 만나 고시원에서 친해지고 고시원에서 연애를 시작한 동갑내기 커플이다. 그리고 1년 전, 소율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소율이 동사무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지는 이제 6개월쯤 되었다. 소율이 이 집에 산 지는 4개월쯤 되었고.

   정훈은 아직 그 고시원에 살고 있다. 정훈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5년째다.

소율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정훈과 소율 둘 모두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하지만 그 해에도 정훈은 사법고시에서 떨어졌다. 그러니 정훈은 소율의 합격 소식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소율과의 관계에서 정훈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갔다. 소율의 친구나 가족과 같이 만나는 자리를 자꾸 피했고 툭하면 소율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내가 아직 이것밖에 안 돼서 너무 미안하다고.    





   “이거 그 쿠키 맞지? 우리 2주 전인가 식당에서 TV 보는데 거기 이런 쿠키 나왔잖아. 홍콩에서 파는 마약 쿠키였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소율이 쿠키 얘기를 꺼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정훈이 고갤 끄덕이며 입을 연다.

   “그래, 그거. 홍콩 버터 쿠키. 그 쿠키 만들 때 쓰던 버터 있잖아. 황금색 종이로 포장돼 있던 버터. 그거 인터넷에 다 팔더라. 그걸로 만든 거야. 모양은 좀 달라도 내용물은 그 홍콩 쿠키랑 똑같아. 아니, 똑같을 걸?”

   “이거 만들 생각은 언제 한 거야? 설마 2주 내내 한 건 아니지?”

   소율이 물었다. 정훈은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설마’를 말한 뒤 빙긋 웃는다. 정훈이 웃자 소율은 마음을 놓는다. 

   “지난 주 주말에 집에 갔거든. 엄마가 반찬 가져가라고 해서……. 거실에 누워서 TV 보는데 우리 그때 같이 봤던 그 프로그램 재방송하더라. 홍콩 쿠키 나왔던 그 편 말이야. 그거 보다가 약속했지. 너한테 그 쿠키 만들어 주겠다고.”

   정훈이 눈짓으로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약속? 나한테 그런 말 없었잖아.”

   “나하고 약속한 거야. 이거 소율이한테 만들어 주자, 하고.”

   정훈의 말에 소율은 볼 안쪽을 깨물며 정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켠 정훈이 뒷말을 이으려 입을 벌린다.

   “행복해지려고.”

   “응?”

   “나는 꿈이 없어. 사법고시 준비하는 건 그냥……. 괜찮은 직업 갖기 위해서지 변호사가 내 꿈인 건 아니거든. 꿈을 가지자니 나는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어. 너무 평범하고 무감각한 인생이지. 근데 니가 웃고 있는 걸 보고 있잖아? 그러면 몸속이 울렁거리면서 머리가 어질해져. 좋아서……. 너무 좋아서……. 롤러코스터 타고 있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이야. 니가 내 앞에서 웃으면 내가 그렇게 돼. 신이 나. 그리고 나는 이것보다 즐거운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이 경험이 내 행복이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너한테 부담 주는 거 아니야, 소율아. 매일 웃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가끔씩 내가 이렇게 너를 웃게 해 주고 싶은 거야. 너를 웃게 해서 온몸이 터져 나가도록 행복해지고 싶은 거야. 그 행복이 나한테 남겨 주는 느낌이 나를 몇 주 정도는 기쁘게 살게 하거든. 난 그거면 충분해.”

   말을 끝낸 정훈이 엄지손톱으로 아랫입술을 긁는다. 정훈의 두 눈동자를 번갈아 보던 소율이 입으로 숨을 짧게 내뱉는다. 소율의 고개가 비스듬히 틀어진다. 소율이 다시 한 번 숨을 짧게 내뱉는다. 이윽고 소율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소율은 울음을 터뜨린다. 소율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정훈은 반쯤 입을 벌리고 허리를 곧추세운다. 괜히 했다, 이런 얘기……. 의자를 뒤로 물리고 일어선 정훈이 소율의 옆으로 다가가 소율의 왼쪽 어깨를 움켜쥔다. 소율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율이 정훈을 올려다본다. 소율의 왼쪽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정훈이 그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뻗는데 소율이 그 손을 쥐고 다시 정훈을 올려다본다.

  “많이 힘들었어?”  

   간신히 짜낸 것 같은 목소리로 소율이 정훈에게 물었다.

   “응?”

   “시험 잘 안 풀려서 너 많이 힘들었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너 훨씬 더 힘들었던 것 같아.”

   반쯤 우는 목소리로 말한 소율이 몸을 일으키고 정훈 앞에 선다.

   “이리 와.”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소율이 정훈을 끌어안는다. 소율은 정훈의 오른쪽 가슴에 오른쪽 뺨을 대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아니야, 안 힘들었어.”

   소율의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정훈이 대꾸했다. 양쪽 팔에 힘을 실어 정훈을 한 번 꽉 안은 뒤 소율은 두 팔을 풀고 반 발짝 뒤로 물러선다. 손등으로 눈물을 대강 훔친 소율이 다시 정훈을 바라본다.

   “나 웃는 거 보려고 쿠키까지 구워 온 사람 앞에서 울어 버렸네. 오늘은 행복 못 주겠다. 대신 뭐 줄까?”

   “이거면 돼.”

   “내가 안 돼. 그럼 약속 하나 해 줄게. 아니다. 너한테 말고 나한테 할 거야. 나도 나한테 약속해 줄 거야. 무슨 일 있어도 너 안 놓칠 거라고 나랑 약속할 거야. 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 두고 떠나 버리면, 나 끝까지 너 찾아낼 거야. 찾아내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너 다시 데려올 거야. 니가 언젠가 변호사 될 거라서 내가 너랑 같이 세월 보내고 싶어 하는 줄 알아? 이 바보야. 그깟 변호사 좀 늦게 되면 어떻고, 변호사 안 된다 해도 그게 뭐? 그렇다고 우리 사이에 뭐가 달라지는데? 너 꿈 없다고 내가 너 싫대? 나도 꿈이 없는데? 너 공부하는 입장인 게 뭐가 어떠냐구. 니 맘 편하게 해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비싸고 대단한 데이트 그런 거 전혀 중요하지가 않아요. 나 직장 생긴 지 이제 겨우 반 년 됐어. 아직 학자금 대출 갚고 있고 이래저래 들어가는 돈도 많아서 주머니 사정 빠듯해.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때나 지금이나 내 사정 똑같아. 그래서 너랑 대학로 걸으면서 데이트하고 조조 영화 보고 그런 거 되게 좋아. 내 형편에 맞고 또 알찬 데이트라 좋다고……. 나한테 직업 생긴 거랑 우리 데이트하는 방식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내가 직장 다니면 더 이상 길에서 뭐 사 먹고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너 그렇게 생각하지? 너 매번 그러잖아. 이런 거 먹여서 미안하다고. 야, ‘이런 거’가 뭐냐? 나 호떡이랑 닭 꼬치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래? 취업 문제로 너랑 나 사이에 거리 만들고 계급 나눠서 자꾸 침울해지는 게 너는 좋니? 나는 뭐 좋을 거 같니? 착각 그만해.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니 취업이 아니야. 막말로, 너 직장 가지든 말든 그건 니 인생이야. 그러니까 그건 니 맘대로 해.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나 만나러 올 때는 우리 생각만 하는 거. 정훈아, 우리 술래잡기 그만하자. 나한테 와서는 그냥 내 옆에 맘 편히 딱 붙어 있으면 안 돼? 눈치 볼 거 없다구. 진짜 없다구. 나는 괜찮다구. 내가 괜찮고 말고 할 게 애초에 없다구. 우리 사이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나한테 너보다 자랑스러운 사람 없어. 내 마음이 이런데, 이걸로 좀 안 되겠어? 부족해? 다른 사람들 시선이 아직도 그렇게 아파? 계속 죄 지은 사람처럼 지낼 거야? 니가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다 찢어지는데?”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소율이 다시 울먹거린다. 정훈이 두 손바닥으로 소율의 얼굴을 감싼다. 

   “니 맘 알지. 모를 수가 없지. 미안해. 니 맘 다 아는데도 한 번씩 자격지심 때문에 속이 비틀어져. 나도 미치겠어. 너한테 왜 이렇게 못나게 구냐, 나……. 미안해. 울지 마. 내가 더 노력할게. 응? 울지 마. 미안해.”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정훈이 우왕좌왕 중얼거리자 소율은 정훈을 쏘아본 뒤 “못됐어, 진짜.” 하고 말한다. 

   “쿠키 맛 하나도 모르겠네.”

   다시 의자에 앉으며 소율이 투덜거렸다. 식탁 구석에서 티슈를 두 장 뽑아 든 정훈이 멋쩍은 표정으로 소율을 쳐다본다. 정훈의 손에 들린 티슈를 가져가며 소율이 다시 정훈을 쏘아본다. 

   “그럼 다른 거 먹자. 뭐 먹고 싶어? 다 먹자.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자.”

   정훈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웃지 마. 미우니까.”   

   소율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정훈은 상자에서 쿠키 하나를 집어 먹으며 빙긋 웃는다. 식은 커피에서 달콤한 향기가 샘솟아 오른다. 티슈를 둥글게 구겨 식탁 한편에 놓은 소율이 “나 짜장면 먹고 싶어.”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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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삶의 순간들을 다룹니다.
너무 흔하면서도 너무 각별해서 절절한 
삶의 순간들 그리고 그 속의 느낌들을 나눕니다.
WRIFE MAGAZINE은 언제나
'사람'과 '마음'과 '함께'를 생각합니다.




책 속 한 문장 :


근데 만약 아빠가 “사람이 빛을 낸다고? 그래? 빛나는 사람 본 적 있나?” 하고 물어 오면 어떡하지. 그러면 난 속수무책으로 그 사람 이름을 말해 버릴 텐데. 부모가 아닌 낯선 누군가를 빛나는 사람으로 지목하는 날 보며 아빤 휑해진 표정을 짓고 말 거다. “품 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지 품 벗어나면 그게 자식이가.” 입버릇처럼 말했어도 아빤 가슴 절반이 도려나간 표정을 짓고 말 거다. 절반이 아니라 그 이상인가?

-소설집『내가 사랑하는 너에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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