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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Dec 20. 2016

섣불리 장담하기에 인생은 길고

가능성의 문을 너무 일찍 닫을 필요도 없고



   사람들 발길과 광기狂氣가 끊이지 않는 카지노와 호텔들, 쉬지 않고 펼쳐지는 각종 공연들, 벌건 대낮에도 거침없이 기울어지는 술병과 술잔들, 거의 매달 새로 오픈되는 레스토랑들, 내일이 올 거란 사실을 잠시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지갑 속에서 카드가 뽑혀져 나가는 소리들, 30분 만에 간단히 끝나 버리는 소규모 결혼식들……. 

   잠들지 않는 도시, 하지만 모두가 반쯤 잠든 듯 보이는 도시, 미국 라스베이거스Las-Vegas의 번화가 다운타운downtown.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라스베이거스가 화려함의 상징이 된 건 이 다운타운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시설과 축제들 덕분이다.

   다운타운의 중심지는 해가 지기 전부터 온갖 네온사인들로 번쩍거린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개선문을 절반 사이즈로 축소 시켜 재현한 호텔 조형물들에도 주황색 불빛이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시간 가는 것에 개의치 않으니 시간 쪽에서도 뭉그적대지 않는다. 금세 저녁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라스베이거스의 필수 관광 코스로 꼽히게 된 벨라지오 호텔 앞에서 분수 쇼가 시작되고 있다. 분수대 앞을 걷고 있던 (많아 봐야 20대 중반으로 보인다) 두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분수대 안쪽으로 고갤 돌린다. 

   잠시 잔잔해져 있던 물속에서 힘찬 물줄기들이 다시 치솟아 올라 이리저리 춤을 춘다. 조명을 받은 물줄기들이 황금색으로 빛난다. 분수 쇼를 구경하던 둘 중 한 사람이 “벌써 8시야?” 하고 소리친다. 옷차림으로 보아 그들은 이 근처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인 듯하다. 

   심드렁하게 분수 쇼를 쳐다보던 그들이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그들이 떠난 그 자리로 멜리사가 걸어 들어온다. 멜리사가 고갤 들고 분수 쇼를 건너다본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멜리사의 고동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아 오른쪽 어깨 뒤로 흩날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머리카락과 함께 검은색 블라우스 자락도 약간씩 펄럭인다.

   멜리사가 라스베이거스에 온 지 오늘로 이틀이 되었다. 이 거대한 분수 쇼도 두 번째 보는 것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긴 처음인데 그게 라스베이거스일 줄이야.     





   20분쯤 뒤, 멜리사는 (도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느 칵테일 바 창가 자리에 앉아 있다. 아까 지나쳐 온 에펠탑 모양 조형물이 여기서도 보인다. 멜리사는 둘째손가락으로 칵테일 잔 테두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다. 잔 테두리에 묻어 있던 소금이 테이블 위로 조금씩 떨어진다. 창가 쪽으로 앉아 있긴 하지만 멜리사가 딱히 뭘 보고 있는 건 아니다. 아직 칵테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멜리사의 눈 초점은 얼마간 풀려 있다.

   멜리사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선다. 왁스나 포마드를 발라 잘 빗어 넘긴 남자의 금발머리에서 윤이 난다. 남자는 키도 크고 덩치도 제법 크지만 경호원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남자의 표정은 긴장돼 있거나 뭔가를 유심히 살핀다기보다는 한껏 여유롭다. 주로 머리를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것도 느껴진다. 남자는 30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로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멜리사는 남자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남자가 고갤 비스듬히 꺾고 멜리사의 표정을 잠시 바라본다. 남자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다. 이윽고 남자가 멜리사에게 말을 건다.

   “헤이, 오늘이 뭐 마지막 날인가?”

   남자의 말소리에 멜리사가 남자 쪽으로 고갤 돌린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보낸 하루 동안 멜리사는 거의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대화라고 해 봐야 호텔이나 식당 직원들과 나눈 의례적인 몇 마디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그럼. 멜리사가 여기서 사귄 친구 같은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흐리터분하던 멜리사 눈빛에 반짝 생기가 돈다.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던 멜리사가 어깨를 살짝 들먹거린다. 역시 남자는 멜리사가 모르는 사람이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멜리사 눈빛에 섞여든다. 

   남자가 두 눈썹을 위쪽으로 크게 밀어 올리더니 “그 눈빛은 뭐지?” 하고 물으며 싱긋 웃는다. 멜리사는 대답 없이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머쓱해진 얼굴로 남자가 다시 입을 연다.

   “혼자 있고 싶은데 방해한 거라면 미안해요. 당신 표정이 너무 어둡길래. 죽을 날 받아 놓고 마지막 여행이라도 온 사람인가 싶어서, 말동무나 해 줄까 했지.”

   쥐고 있던 잔을 멜리사 쪽으로 내밀어 건배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며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남자의 잔 속에 담겨 있던 얼음들이 청아한 소릴 내며 부딪친다. 남자는 탄산수 섞은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 위스키 하이볼highball. 잔에 차 있는 술의 양으로 보아, 남자도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듯하다.

   “비슷해요.”

   다시 자기 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멜리사가 말했다. 허튼 수작 부리려는 남자처럼 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남자의 왼쪽 눈이 살짝 찡그려진다. 멜리사가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진짜 죽는 건 아니고.”

   멜리사가 말끝에 조그만 웃음을 물었다. 남자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끄덕여진다.

   “진짜 죽는 건 아니지만 죽는 것과 비슷한 상태에 놓여 있다……. 난 잘 모르겠네, 그게 뭔지.”

   통유리 창 바깥을 넘겨다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진짜 그냥 말동무나 해 주러 온 거예요? 내가 슬퍼 보이니까? 아니면 표정 왜 그러냐고 말 걸고 나 위로해 주면서 나 어떻게 해 보려고 한 건가?”

   멜리사가 턱 끝을 살짝 치켜들며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가 입으로만 웃었다. 남자의 시선이 얼마간 차가워졌다.

   “당신이 슬퍼 보였던 건 아니고. 나는 슬픈 마음 달래 주는 척하면서 그 사람 쥐고 흔드는 그런 사기꾼이 아니고. 상대 쪽에서 오케이하지 않는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도 아니에요. 이래저래 아쉬울 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 근데 당신은 자기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 보긴 뭘 어떻게 해 봐. 난 오늘 여기 있는 호텔에서 묵을 생각이 없어요. 당신 눈앞에서 쥐고 흔들 호텔방 열쇠 같은 게 없다는 말이지. 우리가 여기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같이 나갈 일 같은 건 없는 거라고. 이제 됐어요? 궁금증이 다 풀렸나?”

   남자가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으며 말을 마쳤다. 멜리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위험하진 않지만 돈만 많은 멍청이일 거라 생각한 남자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온 것이다. 

   “궁금증은 풀렸는데 약간 자존심이 상하네. 너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를 조심할 필요는 없다, 그거잖아.”

   “이해가 빠르시네. 자존심 상했다면 미안해요. 근데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아서.”

   “애인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랑하는데 애인은 아니다?”

   멜리사가 묻자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남자의 뒤로 스테인리스 쟁반을 든 웨이터가 빠르게 지나갔다.

   “궁금한 게 많은 걸 보니 곧 죽진 않겠네.”

   남자가 말했다.

   “말 돌리지 말구요. 사랑하는데 애인은 아니다?”

   “네.”

   “의외로 순정적이시네.”

   “사랑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죠.”

   “이건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직업이 뭐예요?”

   “직업이 왜 궁금하지?”

   “말을 잘해서.”

   “내가 말을 잘해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카지노 딜러. 보아하니 여기 사는 사람은 아니고 잠깐 여행 온 거 같은데, 카지노는 가 봤어요?”

   “아직…….”

   “의외로 순박하시네.”

   남자가 자신의 말을 따라하자 멜리사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카지노 딜러가 뭐하는 건데요?”

   “게임 진행하는 사람. 포커 게임 같은 거 보면 중간에 서서 카드 나눠 주는 사람 있죠? 그게 딜러예요.”

   “섹시하네.”

   “별게 다 섹시하네. 이제 내가 물읍시다. 아까 그 말이 뭐예요? 진짜 죽는 건 아니지만 죽는 거랑 비슷한 상태에 있다고 했었나?”

   “네.”

   “그게 뭔데?”

   “내 인생의 히든카드를 뽑아 버렸어요.”

   테이블에 오른쪽 팔꿈치를 얹고 손등으로 턱을 괸 멜리사가 힘없이 대답했다. 

   “히든카드를 뽑았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 히든카드 좋은 거잖아요. 비장의 무기.”

   “히든카드 좋죠. 좋은데……. 잠시만, 다리 안 아파요? 의자 가져와서 앉아요.”

   멜리사의 말에 남자가 한 발 뒤로 물러선 뒤 옆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 와 앉는다. 칵테일 바의 하우스 밴드가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히든카드 좋은데 왜?”

   남자가 멜리사의 뒷말을 청했다.

   “그걸 너무 빨리 뽑아 버렸어요. 아직 나는 살 날이 많은데, 내 나이가 아직 스물여덟밖에 안 됐는데…….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너무 빨리 얻어 버렸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멜리사가 어물거리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멜리사가 원망 어린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웃어? 누군 심각한데 지금 웃음이 나와?

   “재밌는 아가씨네. 그래서 죽음과 비슷한 상태라고 한 거예요? 히든카드를 이미 뽑아 버렸으니 이제 남은 인생은 별 볼 일 없을 거다, 싶어서?”

   “나는 재미 하나도 없어요.”





   “이봐요, 인생에 히든카드가 딱 한 장뿐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지?”

   웃음기 가신 얼굴로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멜리사는 눈을 깜박거렸다. 카운터 쪽에서 어떤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멜리사가 그쪽을 쳐다보려는데 남자가 팔을 휘저어 멜리사의 시선을 가로챈다. 남자의 손짓에 따라 엷은 향수 냄새가 끼쳐 온다.

   “한눈팔지 말고 대답해 봐요. 당신한테는 딱 그만큼의 행운과 행복만 주어졌다고, 그 이상은 없는 거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지?”

   멜리사는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깨문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다. 인생에 히든카드는 한 장뿐인 거 아니었어?

   믿고 싶지만 믿기 어려운 얘기이기도 하다.

   “못 믿는 눈치네.”

   멜리사의 생각을 환히 들여다본 듯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인생에 히든카드가 한 장이 아니라는 건 그럼 누가 장담할 수 있는데요?”

   멜리사가 물었다.

   “당신이, 내가, 모든 각자가. 전부 자기 하기 나름 아닌가? 인생에 뽑을 수 있는 히든카드가 널려 있어도 하나만 뽑고 ‘이제 히든카드는 없어.’ 하고 주저앉으면 그 인생에 히든카드는 하나뿐이야.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새로운 선택도 하지 않을 테니까. 내 말이 틀렸어요? 그런데 만약에 말이죠. 인생에 들어 있는 히든카드가 정말 하나라고 쳐 보자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절망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지? 일단 히든카드가 하나라도 있으니까 고마운 거고, 인생 속에 없는 히든카드라면 우리가 만들어 볼 수 있는 거니까 크게 문제되지 않는 거고. 아니에요? 인생이 흘러가는 건 인생 쪽에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 쪽에서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운명에 굴복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나는 운명 사이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많다고 생각하는데.”

   말을 마친 남자가 자기 잔을 들고 술을 한 모금 홀짝거렸다.

   “이렇게 생각도 명쾌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생긴 것도 괜찮고 직업도 섹시한 남자가 아직 짝이 없다. 외기러기처럼 짝사랑 중이다.”

   멜리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게 인생이야.”  

   남자가 잔을 들고 일어서며 멜리사에게 윙크했다. 멜리사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트럼프 카드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인생에 히든카드가 하나가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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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삶의 순간들을 다룹니다.
너무 흔하면서도 너무 각별해서 절절한 
삶의 순간들 그리고 그 속의 느낌들을 나눕니다.
WRIFE MAGAZINE은 언제나
'사람'과 '마음'과 '함께'를 생각합니다.




책 속 한 문장 :


겁이 났어. 겁이 나서 아닌 척했어. 너 마주치고 너한테 말 걸고 니 얘기 듣고……. 앞으로 그런 거 못할까 봐.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너랑은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아닌 척했어. 하루만 더 니 얼굴 봐야지. 하루만 더 너랑 인사해야지. 하루만 더 니 목소리 들어야지. 하루만 더 니 이름 불러야지. 하루만 더 잘 자라고 해야지.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어. 그렇다고 지금은 니 얼굴 보고 너랑 인사하고 니 목소리 듣는 거 안 아쉬워서 이 얘기하는 거 아니야.

-소설집『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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