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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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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Dec 13. 2016

철이 든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런 관계에 아무 감흥 없어



   7월 말의 해수욕장 풍경은 터져 버린 개미집을 방불케 한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여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부서진 파라솔 잔해와 찢어진 고무 튜브가 모래사장 한편에 쌓여 있다. 파라솔은 오전 중에만 세 개가 부러졌다. 부러진 파라솔이 돌아올 때마다 파라솔 대여 업체 사장은 ‘도대체 뭘 하길래 파라솔이 부러져? 뒤집어서 타고 노냐고?’ 하고 생각하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곤 했다. 
   까만색 제트 스키 두 대가 하얀 물거품을 튀기며 수평선 쪽으로 내닫는다. 모래사장과 바다 사이로 팔 근육 우락부락한 해양 경찰이 걷고 있다.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해양 경찰이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훅 분다. 높고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후텁지근한 대기를 뒤흔든다.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손 안 대고 호루라기를 그냥 뱉어 버린 해양 경찰이 수영하는 관광객 몇 사람에게 경고를 준다. 호루라기 소리만큼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다. 하지만 관광객들은 해양 경찰의 경고를 간단히 무시한다. 해양 경찰의 선글라스가 머리통에 비해 너무 작은 거 아니냐고 저들끼리 비웃을 뿐이다. 해양 경찰이 낀 선글라스가 주먹밥에 잘못 붙은 김 조각 같다고……. 
   오후 4시를 넘어서면서 뜨겁던 햇살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팔뚝을 앞뒤로 흔들며 숙소로 돌아가는 이들이 속속 보인다. 해수욕장 명소名所답게 이곳은 온갖 숙박시설로 가득하다. 모래사장을 빠져 나와 길 하나를 건너면 가로로 쭉 늘어선 상가들이 보이는데, 상가들 사이사이에 작은 길이 나 있다. 그 길로 접어들면 그 뒤로는 모두 숙박시설이다. 





   방을 예약하면 커다란 마루를 마음껏 쓸 수 있다고 선전하는 ‘푸른 바다 민박’의 2층 현관문이 열린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건 태린이다. 긴 해수욕을 끝내고 막 씻고 나오는 참이다. 아직 피부에 소금기가 좀 남아 있는 것 같다. 
   태린이 현관문 앞 마루에 걸터앉는다. 태린의 가느다란 손이 젖은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질끈 묶는다. 머리를 말리긴 귀찮고 젖은 머리카락을 귀신처럼 풀어헤치고 다니긴 좀 그러니까……. 머리 끈 안쪽이 젖어들기 시작한다. 엉겨 붙은 머리카락 끝이 등과 목 사이에 닿으며 축축한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고 태린은 생각한다. 
   태린이 문득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본다. 태린은 헐렁한 옷을 하나 걸쳐야 하나, 잠시 고민한다. 윗도리고 아랫도리고 너무 짧다. 예뻐 보이는 것과 값싸 보이는 것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태린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차림은 확실히 값싸 보이는 쪽인 것 같다. 마루에서 몸을 일으킨 태린이 열린 현관문 쪽으로 돌아섰다. 
   “어디 가?”
   현관문에서 막 나온 현정이 태린에게 물었다.
   “옷 가지러.”
   “무슨 옷?”
   “그냥, 걸칠 거.”
   “추워?”
   “아니. 이거 너무 짧잖아.”
   “짧긴 뭐가 짧아, 이 여름에!”
   “아니야. 짧아.”
   태린이 약간 울상 지으며 말하자 현정이 싱긋 웃는다. 현정은 “너는 시집 잘 가겠다.” 하고 말하며 태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태린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지만 현정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정도 대답할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그냥 태린을 보며 ‘쟤는 시집 참 잘 가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냥…….
   열린 현관문 안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까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다 같이 보고 있는가 보다. “이 사진 지워! 아, 지우라고! 나 너무 못생기게 나왔잖아!” 하는 고함소리가 웃음소리에 섞여들었다. 태린은 슬리퍼를 벗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며 “배고파! 뭐 좀 먹자!” 하고 소리쳤다.





   태린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러 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 만에 다 모이는 것이었다. 태린은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그래서 대학 진학한 친구들끼리 자주 모여 놀았다. 주말이나 방학에……. 
   그런데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친구들하고는 얼굴 볼 일이 많이 없었다. 사회 초년생인 그들은 잠깐의 짬을 내는 것도 벅차 했다. 정말 벅차 했다. 그들은 태린에게 ‘도저히’라는 말을 자주 했다. 태린아, 도저히 시간이 안 나. 미안해, 도저히 안 되겠어. 
   학교에서 성적을 내는 것과 회사에서 성과를 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인 모양이었다. 물론 태린이 그들의 속사정까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대학 진학한 친구들끼리 자주 봤다 해도 이렇게 며칠씩이나 함께 보내는 건 (졸업 후) 처음 있는 일이다. 태린의 일행은 어제 밤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어제 저녁부터 태린은 3년이 결코 적지 않은 세월임을 실감했다. 다들 너무 많이 달라졌다. 말투도 달라지고 표정도 달라지고 생활 습관 같은 것들도 묘하게 달라졌다. 태린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태린 또한 친구들로부터 많이 변했다는 소릴 들었다. 자기가 변했다는 그 말이 선뜻 와 닿지는 않았지만 태린은 고갤 끄덕거리며 “그럼, 나도 변했지…….” 하고 우물거렸다. 자기 자신의 변화는 너무 느려서 다른 사람들이 봐 줘야 더 선명히 보이는 거겠지, 하고.





   임무를 완수한 태양이 서쪽 하늘 밑으로 떨어졌다. 잔잔한 바다엔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한데 어우러져 넘실거렸다. 음식 타는 냄새와 사람들 몸속에서 나온 술 냄새, 담배 냄새 따위의 온갖 냄새들이 바람에 한껏 섞여들어 있다.
   태린의 친구 문희가 어디서 낯선 남자를 하나 데리고 왔다. 현정의 말을 빌리자면 남자를 하나 물고 온 것이다. 문희가 “오늘 이 사람들하고 놀자.” 하고 말하자 문희 옆에 서 있던 남자는 약간 수줍다는 듯 웃었다. 남자의 짧은 머리카락이 두상에 딱 붙어 있었다. 모자를 오래 쓰고 있다가 벗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문희가 말한 ‘이 사람들’은 남자의 일행인가 보았다. ‘남자 빼고 우리끼리 놀자.’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들의 의견은 말끔히 묵살되었다. 태린은 남자 빼고 놀자는 쪽도 아니었고 그 쪽을 핍박하는 쪽도 아니었다. 태린은 모든 일을 뒤에서 지켜본 뒤 최종 의견을 적당히 따르는 종류의 사람이다.


   30분쯤 뒤, 태린의 일행은 남자의 일행이 머무는 숙소 옥상 마루에 둘러앉아 있었다(해수욕장 민박집 영업 기준에 ‘마루를 반드시 설치할 것’ 같은 조항이 있는 걸까? 해수욕장 올 때마다 마루 없는 민박집을 거의 본 일이 없다). 그곳 마루는 태린 네 숙소 마루보다 훨씬 넓었다. 마루 둘레로 술이 박스 째 쌓여 있었다. 

남자의 일행은 산악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이었다. 이 근처 산에서 자전거를 탄 뒤 이리로 넘어와 휴가를 즐기기로 한 것이다. 자전거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건 소영이었다. 하얀 모자 쓴 남자가 콧소리를 내며 웃은 뒤 “차에 붙어 있죠.” 하고 소영에게 대답해 주었다. 태린은 코딱지만 한 차에 커다란 자전거가 붙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남자의 일행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스물다섯 살이고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서른두 살이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다들 건강하고 앳돼 보였다. 운동하는 사람들 치고 체격이 그리 우람하지도 않았다. 
점심도 대충 먹고 곧장 술을 마시는 바람에 다들 일찍 취해 버렸다. 술자리가 두어 시간을 넘어가자 몇몇 이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사라져 버렸다. 둘씩, 둘씩. 태린은 사라진 이들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놀러 나와도 대학 친구들과 노는 풍경이 돼 버린단 사실을 가만히 곱씹을 뿐이었다. 괜찮은 상대 팀을 물색하고 그들과 즐기며 술값을 아낀 뒤 마지막은 개인플레이. 





   아무래도 난 ‘우리끼리 놀고 싶은 쪽’이었나 봐, 하고 태린은 생각했다. 눈앞에 벌어진 술자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취기 덕분에 기분은 좋았지만 취기와 분위기는 별개니까. 
   태린은 나무젓가락을 종이컵 위에 얹어 놓으며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알코올 냄새가 호흡에 섞여 나왔다. 자기 날숨에 섞인 알코올 냄새의 강도로 태린은 자신의 취한 정도를 가늠해 보곤 한다. 아직 취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술을 더 마시고 싶긴 한데 술맛이 나질 않아서 문제지…….
   남자들과의 술자리가 싫은 건 아니다. 하루나 이틀 정도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홀가분함도 좋다. 내가 보여 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줘도 되니까. 따분한 일상생활 얘기 같은 건 꺼내지 않아도 되니까. 나도 상대도 서로를 질려 할 틈이 없으니까. 그 잠깐 동안만큼은 서로 강렬한 눈빛을 주고받고 서로에게 깊이 집중하니까.
   가로등 등불에 덤벼드는 불나방처럼 반짝 타오르는 그런 관계가 태린은 편안했다. 미적지근하게 남는 것도 없고. 그런데 왜 지금은 그런 관계가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 걸까. 편안함이 부질없음으로 변질돼 버린 이유가 뭘까.



이제 할 만큼 한 건가. 그런 관계.





   무게 잡고 심각한 얘기 나누며 개인적인 역사와 아픔을 공유하는 건 어쩐지 부담스런 일이라 생각했는데……. 한없이 가벼운 관계보다는 차라리 그런 묵직한 관계가 낫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건가. 


   태린은 전화할 곳이 있다고 둘러댄 뒤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태린의 걸음이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태린은 아까 걸치고 나온 훌렁한 셔츠를 여미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슬리퍼 안쪽으로 모래가 들어와 버석거렸다.
이런 마음을 느끼기에 나는 아직 너무 어린데, 하고 태린은 생각했다. 좀 더 즐겨도 되잖아?
   구름이 적고 달빛이 환한 밤이다. 시커먼 바다 물결 위로 조각난 달빛들이 흩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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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삶의 순간들을 다룹니다.
너무 흔하면서도 너무 각별해서 절절한 
삶의 순간들 그리고 그 속의 느낌들을 나눕니다.
WRIFE MAGAZINE은 언제나
'사람'과 '마음'과 '함께'를 생각합니다.




책 속 한 문장 :


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당신만큼 마음 씀씀이에 노련하지 못하다. 그래서 당신을 좋아할수록 엉뚱한 분량의 마음을 꺼내 주게도 될 것이다. 난데없이 좋아한다고 분위기 깨는 일은 없어도, 벌게진 얼굴이 그 고백을 대신해 버리는 날이 있을 것이다.

-산문집『커피 한 잔 해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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