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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Dec 01. 2016

오늘만 쓸 수 있는 편지

수신인은 오직 당신



내 신경은 항상 네 쪽으로 향해 있어.



   그 신경을 늦출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걸 끊어 버린 일은 없어. 사실 아무 노력이 들지 않는 일이거든. 네게 신경 쏟는 일은 호흡처럼 쉽고 편안한데 끈질겨. 끊는다는 게 가능하지 않아. 이걸 끊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었고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해 봤자 웃겨. 웃길 뿐이야.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거든. 모든 게 ‘저절로’야. 운명의 작용이 이런 거라면 난 운명을 믿어. 믿을 수밖에. 지금 그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데. 

   나는 앞으로도 이런 상태일 거야. 물론 ‘영원히’라고는 할 수 없겠지. 그건 거짓말이잖아. 나는 내가 겪지 않은 시간을 이미 겪은 듯이 말하고 싶지 않아. 잠깐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널 속일 순 없어. 알량한 속임수로 네 마음을 얻고 싶진 않아. 

   나는 다만 널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야. 나는 몇 마디 말로 네 곁과 마음을 사들이는 장사치가 아니야. 그러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근데 지금은 아니야. 나는 네 옆자리와 마음을 값어치로 환산해 (그게 제법 값나간다고 생각해서) 슬쩍슬쩍 넘보고 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는 값으로 매겨질 수 없는 사람이야. 시절 따라 그 가치가 오르내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너는 특히나 더 그래. 

   너는 모든 순간 내게 무한한 가치야.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무한한 의미야. 나는 다만 여기서 무한한 널 바라볼 뿐이야. 네가 손을 뻗어 오면 그걸 조용히 감싸 쥐며 “좋아해. 고마워.” 하고 말할 뿐이야. 혹은 “괜찮은 거지?” 하고 네 얼굴빛을 살필 뿐이야. 그렇게 매일을 살면서 나는 네가 내게 안겨주는 가치(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가치와 그 가치에서 오는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어)에 감사해 할 뿐이야. 너랑 나 사이에 한 겹씩 쌓이는 의미들을 즐겁게 보관할 뿐이야. 난 그거면 충분해. 넘치게 충분해.    





   하지만 확인시켜 주고 싶어. 이렇게 한동안 내 신경이 너한테 향해 있었다는 걸. 앞으로도 한동안은 (‘평생’은 아니어도 ‘한동안’ 정도는 내가 확실히 예측할 수 있으니까) 내가 널 지켜볼 거라는 걸. 물론 너만 괜찮다면 나는 너한테 그렇게 해 주고 싶어. 

   내가 말하는 ‘한동안’이 계속 쌓여 언젠가 ‘영원’과 ‘평생’이 되길 바라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미래를 엿보고 싶어. 모든 미래에 내가 너와 함께였다는 사실을 보고 싶어.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 모습을 너한테 말해 주고 싶어. 가짜 맹세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진술로 너한테 말해 주고 싶어.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고.
함께이고, 함께일 거라고. 



   그래서 나는 너한테 확신을 주고 안도감을 주고 싶어. 적어도 나라는 한 사람만은 자기 목숨 다할 때까지 네 옆에 있을 거란 믿음과 잔잔한 행복. 인생이 통째로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을 단 하나의 인연. 필연. 나는 너한테 그런 것들을 주고 싶어.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들이 전부야. 그리고 나는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이것들이 절대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건 너한테 줄 수 있는 전부이자 내가 가진 전부이기도 하거든.    


   내가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네 마음만큼이나 나도 두려워. 네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내가 당장은 그 두려움을 덜어 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모든 건 시간이 지나 봐야 분명해질 거잖아. 내 마음이 아무리 분명하다 해도 네가 이 마음을 꺼내 볼 수 없는 이상 우린 시간에 의지해야 해. 시간이 모든 걸 증명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러니까 그때까지 내가 계속 말해 줄게. 오늘도 나는 너랑 함께 있다고. 물론 너만 괜찮다면 말이야.

   시간이 모든 걸 사실로 선포하기 전까지 내가 네 옆에서 계속 말할게. 오늘의 진실을 또박또박 말할게. 널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내가 여기 있다고. 얼마든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내가 있다고.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네 얼굴을 떠올려. 어느 날은 활짝 웃는 네 얼굴을 떠올리고 어느 날은 눈물에 젖은 네 얼굴을 떠올려. 똑같은 얼굴을 떠올린 적은 없어. 나는 매번 다른 널 떠올리거든. 네 얼굴을 떠올리는 게 분명 나이긴 한데……. 내 어느 부분이 네 모습을 내 머릿속에 재생시키는지는 모르겠어. 어떻게 그렇게 매일 색다른 널 떠올릴 수 있는 건지…….

   졸음과 네 새로운 얼굴이 흐려질 때마다 나는 생각해. 언제 이렇게 많은 네 모습들이 내 안에 쌓인 걸까. 한 사람 속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은 과연 어느 정도 되는 걸까. 끝이 있긴 한 걸까. 너와 관련된 흔적들이 벌써 이렇게 많이 모인 걸 보면 내가 널 담는 일에 한계 같은 건 없나 봐.    


   인간의 언어가 하찮게 느껴질 만큼 내 마음이 너무 커져 버렸어. 이 마음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걸 너한테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내가 얼마나 답답한 줄 알아? 

   너야. 이 마음이 가려던 곳과 가고 있는 곳과 마침내 가게 될 곳 모두 너야. 말도 안 되는 이 마음이 준비되고 시작되고 움직이는 모든 이유가 너야.    





   그러니까 조금은 안심해도 돼. ‘이 사람을 이렇게 믿어도 되나.’ 싶을 때……. 아주 조금은 안심해도 돼. 

   네가 차츰 마음을 놓는 동안 나는 좀 더 노력해 볼게. 내 마음을 좀 더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말들을 고민할게. 내 마음과 다른 것들은 말하지 않도록 조심할게. 

   그렇게 차근차근 시간을 보내자.

   그러다 보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무색해질 그 날이 올 거야. 그 무색함이 허탈하지 않고 유쾌해질 그 날이 올 거야.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자기 마음을 알려 주려 이렇게 애를 쓰지만……. 우리 마음은 서로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라. 우리가 모르는 자기들끼리의 언어로 벌써 뭔가 통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오늘은 오늘의 힘으로 이렇게 살아가자. 오늘만큼 알게 된 것들에 감사하면서.    


   내일에도 나는 여기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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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삶을 관통하는 순간과 

순간이 주는 절묘한 느낌들을 나눕니다.

WRIFE MAGAZINE의 모토는 

‘사람’과 ‘함께’입니다.




책 속 한 문장 :


오래 볼 수 있으니까. 예쁘고 우아해도 오래 볼 수 없는 것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하니까.

-산문집『그 곁에 앉아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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