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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Nov 27. 2016

가 버린 줄 알았어

애매모호함을 해소해 버린 그 찰나



   손재주가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 핀셋이나 송곳 같은 아주 섬세한 도구로 만든 것 같은 뽀얀 밀랍 인형. 그 여자는 그런 첫인상을 내게 주었다. 새하얀 피부에 적당히 굵은 뿔테 안경 그리고 선이 단정하게 떨어지는 검은색 치마. 옷차림만큼 단정한 입매. 필요치 않은 건 절대 시야에 담지 않을 것 같은 정확한 눈빛.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분위기. 엷은 안개에 둘러싸인 것 같은 아리송한 표정. 그 여자의 그런 모든 요소들은 가장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아주 긴 세월 동안 철저히 준비돼 왔던 것처럼……. 어긋나거나 부자연스러운 면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그 여자에게 받은 인상의 전부였다. 처음 마주친 그 날 그 여자를 살펴본 이후로 그 여자를 주의 깊게 본 일이 없었다.

   그 여자와 나는 제약 회사 직원이었다. 우리는 한낱 동료 사원일 뿐이었다. 그 여자와 내가 같은 사무실을 쓰긴 했지만 (그 여자도 나도 신약을 제조하는 연구원이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머무는 곳을 연구실이라 하지만 우리끼리는 그냥 사무실이라 했다) 우리 자리는 뚝 떨어져 있었다. 나는 구석 자리를 썼고 그 여자는 출입구 근처 자리를 썼다. ‘사원들은 반드시 정해진 자리를 써야 한다.’ 따위의 규칙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몇 년 간 같은 자리를 사용했다. 단 한 사람도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다. 졸린 눈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모두들 자기가 첫 출근 날 앉은 그 자리로 걸어 들어갈 뿐이었다. 인간은 적응적인 동물이 아니라 순응적인 동물에 가까운 모양이다. 적응은 그때그때 유연하게 대처하는 거지만 순응은 처음 주어진 그 환경에 계속 녹아들어 있는 거니까. 적응의 동물을 순응의 동물로 만드는 건 뭘까. 사회 시스템? 아니면 똑같이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 둘 다 똑같은 말인가…….    

   우리가 근무하는 제약 회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신입사원을 연초와 연말마다 뽑을 일도 없었다. 사원들이 회사를 떠나면 윗선에서 조용히 신입사원을 뽑을 뿐이었다. 그러니 거창한 공개 채용 기간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공개 채용 같은 건 아무래도 절차가 복잡하고 성가신 일이다. 회사 간부들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뽑아 쓸 만한 인재들을 수소문했다. 

   적당해 보이는 ‘물건’이 물색되면 간부들끼리 형식적인 면접 날짜를 잡았다. 간부들은 근엄한 얼굴로 몇몇 물건들을 회의실 한편에 쭉 앉혀 놓고 그들의 얼굴과 경력을 확인했다. 면접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길어야 20분 남짓. 간부들은 “연락 주겠다.”는 간결한 말과 함께 면접 응시자들을 되돌려 보내곤 한두 사람을 면접에서 탈락 시킨 뒤 나머지 사람들을 출근 시켰다. 여기서 ‘탈락 시키는 사람’이라는 것도 미리 계산된 것이었다. 아니, 계산된 거라고들 했다. 나도는 소문이 그랬다. 특별할 것 없는 회사 생활에 반짝 활기가 도는 건 이런 뒷소문이 파다하게 나돌 때뿐이었다. 단조로운 회사 생활 속 사원들은 누가 뿌려 주는 가십거리를 먹고 사는 수족관 속 열대어 같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판에 박힌) 생활이 너무 좋았다. 서른 가까이 정착 비슷한 것도 못해 보고 살아온 내게 매일 갈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취직 후로는 악몽 꾸는 습관도 없어졌다. 내가 꾸는 악몽은 내용이 늘 똑같았다. 그 악몽 속에서 나는 뗏목 위에 있었다. 낡아빠져 곧이라도 뒤집어질 것 같은 뗏목 위에. 뗏목 밑에는 시커먼 바다가 있었다. 나는 바닷물을 젓고 나갈 수 있는 노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다. 뗏목 위에 있는 건 내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나는 거친 물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죽을 것 같은 불안에 시달렸다.  



  


   내 회사 생활에 ‘이변’이 생긴 건 취직 후 2년째 되던 겨울이었다. 우리 회사가 다른 제약 회사에 인수 합병되기로 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 그 커다란 회사에 우리 회사가 잡아먹힌 것이다. 다행히 정리 해고 사태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식구들은(헤어질 때 되고 나서야 식구라는 이런 정감 가는 표현을 사용하다니. 사람 귀중한 줄 알려면 역시 한두 번은 헤어져 봐야 하는 건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 사무실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전근을 가게 됐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와 내 새로운 발령지는 두 시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세 오갈 수 있지만 가려고 마음먹기가 마냥 쉬운 거리는 아니었다.

   실은 그때쯤 그 여자와 나 사이가 뭐랄까……. 약간 돈독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회사가 아닌 곳에 각자 머무르면서 서로 전화 통화도 주고받고 문자 메시지도 나누었다. 회식 때 몇 마디 나눈 게 계기가 돼서 조금 친해진 것이었다. 회사 밖에서 따로 만나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한 건 아니지만……(우리 둘 다 그런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꼭 무슨 특별한 사이여야 휴일에 볼 수 있는 건 아닌데 서로를 집 밖으로 불러내기가 어려웠다). 그 여자와 보내는 시간은 더 이상 동료 사원들끼리의 시간 같지 않았다. 약간의 애틋함과 아쉬움 같은 게 늘 남아 있었다. 그 여자가 내 이름 부를 때 몸속이 뜨끈해 올 때가 몇 차례 있었고 내 손길에 그 여자가 몇 번 주춤거릴 때도 있었다. 어느덧 나는 그 여자와 통화할 때면 수화기를 귓가에 바짝 가져다대고 있었다(전자파 때문에 통화할 때마다 수화기를 귀랑 떨어뜨려 놓는 편인데). 회사에서 내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그 여자가 따라 나와 “성채 씨 잠깐만…….” 하며 내게 이것저것 건네주는 일도 잦았다. 그 여자가 그다지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내 눈길을 스스로 알아차리곤 헛기침하며 고갤 돌리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 여자는 더 이상 밀랍 인형 같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이 완전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 여자 첫인상 때문에 생긴 내 오랜 환상이 깨져서 나는……. 좋았다. 중립이 무너진 그 여자 솔직한 눈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 여자가 “아, 짜증나.”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 여자가 내 앞에서는 밀랍 인형처럼 굴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 우리에게 이별의 순간이 왔다. (내가 뭐라고) 슬퍼해도 될지 말지 애매한데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았다. 회사 인수 합병 소식을 전해 듣고 난 뒤로 우리 사이가 약간 서먹해진 것도 같았다. 차가운 기류 같은 게 그 여자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는 그 기류를 서운함이라고 해석했는데 그 여자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 여자와 함께 지낸 2년의 시간을 좀 더 알뜰히 썼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늦게 친해져서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돼 버렸다. 나는 그 여자와의 관계를 진전 시키고 싶은 한편으로 (전근 후) 우리 사이에 놓일 거리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계속 모호한 태도로 그 여자를 만났고 그건 그 여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전근까지 2주가 남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선들선들하지만 화창해 초겨울 같지 않을 거라던 기상청 예보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오후가 되자 빗줄기가 굵어졌다. 빗속에 눈발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 일할 맛 더럽게 안 나는 날씨였다. “날씨도 뭐 같은데 일찍 퇴근하자!”며 사무실 문 밀고 들어오는 상사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퇴근 무렵부터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어둑해진 하늘에 안개비가 자욱이 내렸다. 동생에게 차를 빌려 준 까닭에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후 8시 17분. 동생이 친구들과 한창 술판 벌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 한량 녀석이 조금 부러웠다. 하지만 2년 전 그때 그 놈팡이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아직은 이 규칙적인 생활과 안정감이 좋았다. 

   지난 생활과 이 생활을 한참 비교해 보고 있는데 왼쪽에서 (대놓고 뛰는 건 아닌데 어쩐지 뛰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갤 돌려 보니 그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가 시야에 들어오자 눈알이 약간 따끔거리면서 동공이 커지는 느낌이 났다. 마음속에서 그 여자 이름이 간판 네온사인처럼 번뜩 떠올랐다. 이유채.

   그런데 유채 씨가 왜 벌써 이곳에 있는가. 아까 회사 로비에서 만났을 때 목도릴 두고 왔다며 사무실로 다시 올라가지 않았던가. 나는 다시 핸드폰 액정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유채 씨와 헤어지고 고작 7분이 흐른 상태였다. 로비에서 사무실로 다시 올라갔다 여기까지 오려면 족히 15분은 걸릴 텐데. 더구나 유채 씨는 걸음이 빠른 사람도 아니었다.

   “목도리 가지러 간 거 아니었어요?”

   내가 유채 씨에게 물었다. 유채 씨는 고갤 저으며 코트를 벗어 들었다. 안개비 내리는 이 으슬으슬한 날씨에.

   “여기서 옷을 왜 벗어요.”

   내가 둘째손가락을 유채 씨 코트에 가져다대며 목소릴 높였다.

   “뛰어서.”

   유채 씨가 버스 노선 표 쪽으로 시선 돌리며 간단히 대답했다. 뛰어서…….

   “왜 뛰어요?”

   “가 버렸을까 봐.”

   “네?”

   “오늘 버스 타고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나 때문에 뛰었어요?”

   “가 버린 줄 알았어.”

   조용히 숨을 고르며 유채 씨가 우물거렸다. 나는 어깨선이 드러나는 유채 씨 니트 티를 바라보았다. 니트긴 해도 너무 얇다. 아무래도 코트를 다시 입어야 할 것 같은데. 가져온 목도리도 두르고. 나는 유채 씨 어깨에 손을 올리며 코트를 다시 입으라고 할 작정이었다.

   유채 씨 어깨에 내 손바닥이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손바닥에 물기를 느꼈다. 열기도. 유채 씨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날씨에. 진짜 뛰었구나. 유채 씨가.

   진짜 뛰었구나. 여기까지 오려고.

   나는 손바닥을 떼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른 코트 입으라고 해야 하는데 나는 차가 지나다니는 물기 어린 도로만 내려다보았다.     

   내 손바닥에 그 축축함과 뜨거움이 느껴지는 순간 유채 씨에 대한 내 애매모호함이 말끔히 정리되었다. 이 여자를 그냥 이렇게 내 세상 밖으로 내보내면 안 되겠구나. 저 불편한 구두를 신고 이렇게 땀을 내며 내게 뛰어온 여자가 아닌가. 

   유채 씨가 내게 코트와 가방을 내밀었다. 내가 그것들을 받아들자 유채 씨는 손목 안쪽에 차고 있던 머리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었다. 유채 씨가 머리카락을 묶는 동안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유채 씨는 묶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지나가는 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저거 타고 가는데.”

   코트와 가방을 다시 가져가며 유채 씨가 말했다.

   “네?”

   “내가 탈 버스 지나갔다구요. 성채 씨는 몇 번 타고 가는데요?”

   “저는 618번요.”

   “음…….”

   “왜요?”

   “그거 타고 가면 되겠다, 나도. 한 번 갈아타면 되거든요.”

   유채 씨가 버스 정보 안내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쪽을 올려다보았다. 618번 버스가 오기까지 8분이 남았다. 시선을 떼려는 순간 8분이 7분으로 바뀌었다.

   나는 유채 씨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전근은 2주 남았고 우리가 같이 탈 버스가 오기까지는 7분 남았다. 2주 뒤 우리 사이에 놓일 시간은 2시간. 

   그게 뭐?

   나는 유채 씨 어깨에 다시 손바닥을 올렸다. 이제 물기도 없고 열기도 없다.

   “코트 다시 입어요.”

   유채 씨 가방을 들어 주며 내가 말했다.

   “네.”

   유채 씨가 접힌 코트를 펴며 대답했다. 

   “집에 가서 뭐할 건데요?”

   코트 입는 유채 씨에게 내가 물었다. 코트에 왼쪽 팔을 끼우며 유채 씨가 나를 돌아보았다.

   “모르죠.”

   “딱히 하는 건 없다?”

   “아직은요.”

   “밥 먹을래요?”

   “지금?”

   “지금.”

   “어디서?”

   “어디서든.”

   “둘이?”

   “같이 밥 먹고 싶은 사람 누구 있어요?”

   “그럴 리가. 아니, 그럴 리가가 아니라…….”

   코트를 다 입은 유채 씨가 더듬거리며 가방을 받아 쥐었다.

   “유채 씨, 우리 매일 같이 저녁 먹을래요?”

   “네?”

   “아니다. 일단 오늘 저녁부터…….”

   나는 고갤 떨어뜨리다 말고 버스 정보 안내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618번 버스가 전전 정류장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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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선생님. 살아 계실 때 그러했듯 지금도 평안하시지요. 저도 죽음이 아니라 삶 속에서 평안을 얻고 싶습니다.

-소설집『나고 살고 사랑하고 죽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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