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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Feb 02. 2017

여행, 당신과 나의 정겨운 발각

여행이 우리 대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들



여행 가방.



   지내다 보면, 여행 가방 꾸릴 일이 종종 생깁니다. 마음먹고 떠나는 며칠짜리 여행이든. 친척집에 잠시 머무르러 가는 즉석 여행이든, 뭐든. 

   당신은 여행 가방과 관련된 어떤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나요? 여행 가방 싸는 문제로 여러 번 고민에 빠지곤 했던 당신. 그런 당신이기에, 당신이 가진 여행 가방 에피소드들은 남들 것보다 훨씬 재미날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묘미는 주인공의 갈등과 번뇌에서 나올 때가 많으니까요. 주인공에게 조금 미안한 소리이긴 해도.


   내게도 여행 가방과 관련된 에피소드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에피소드는 모든 여행마다 나를 따라다닙니다. 지금도요. 

   그 에피소드는 바로 ‘입을 옷을 매번 남겨 오는 것’입니다. 나는 챙겨 간 모든 옷을 다 입지 못합니다. 몇 벌의 옷은 싸 들고 간 그대로 들고 와요. 괜히 접힌 자국만 남겨서. 





   여행에 들고 갈 옷들을 방에 가져다 놓을 때마다, 나는 여행 일정을 곱씹습니다. ‘첫째 날은 이런 걸 할 테니 이 옷을 입자. 둘째 날은 그런 걸 할 테니 그 옷을 입자.’ 그런 식으로 옷가지들을 챙겨 모으거든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가 한없이 논리적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길 줄 아는 알뜰살뜰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여행 떠나기 직전에 가방을 메면서는 더없이 즐거운 마음입니다. 내가 아주 효율적으로 짐을 챙긴 줄 알거든요. ‘너무 효율적인 건가? 나중에 뭐가 부족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마저 들 정도입니다.


   근데 막상 여행길에 오르면, 가방은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 차, 괜한 무게만 나가는 체력 단련 도구’가 됩니다. ‘집 밖에선 매일 옷을 갈아입자.’고 마음먹어 놓고, 어제 입었던 외출복을 또 입는 나를 나는 깨닫지 못합니다. ‘가방 속이 왜 이렇게 복잡하지?’ 하며 어리둥절해 하기만 해요. 

   결국 집에 돌아와 보면, 쭈그러져 있는 티셔츠나 모자 같은 걸 가방 맨 밑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챙겨 가도 모자랄 것 같아, 마음 졸이게 했던 짐들의 70%도 다 쓰지 않고 돌아온 것입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행 떠나기 전엔, 입을 옷이 부족해 세탁소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늘 예상하는데. 옷을 아예 안 갈아입는 것도 아닌데. 항상 입을 옷이 남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자꾸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옷만큼 잡다하게 챙기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책입니다.



   나는 여행길이 무슨 고요한 도서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책을 잘 읽을 수 있을 걸로 확실히 믿어 버려요. 그래서 여행 가방 속에 책을 꼭 두 권 이상 집어넣습니다. 안 들어가는 걸 억지로 끼워 넣을 때도 있습니다. 책 모서리 때문에 옆구리 툭 불거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서, 나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낍니다. 책을 충분히 챙겼으니, 시간을 헛되게 보낼 일은 없겠다고.

   그런데 여행에는 ‘헛되게 보낼 만한 시간’ 같은 게 애초에 많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터미널이나 역에 가면 표를 끊어야 하죠. 차에 올라타면 짐을 정돈해야 하죠. 그 다음 일정을 확인해야 하죠. 식사 시간을 체크해야 하죠. 그러다가 책을 몇 글자 보려고 하면, 시끄러운 승객이 꼭 한두 명씩 나타납니다. 운이 좋아 객실이 조용할 때는 졸음의 급습을 당합니다. 여행 준비하느라 어지간히 피곤했다 보니. 

   일정 사이사이 비는 틈에는 화장실에 가야 합니다. 커피를 마시거나, 또 다른 급한 볼일을 해결해야 하기도 합니다. 느긋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마음 편히 책 읽을 시간 같은 건 거의 확보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매번 여행길에 챙겨간 책의 30%만 읽고 돌아옵니다. 그런데도 매 여행마다 금붕어가 돼요. 지난 여행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또 책을 챙깁니다. 성실하게. 진지하게.    





   습관적인 행동은 그 사람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고 하죠. 여행 짐을 챙기는 이런 내 습관도 그러네요. 내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옷을 많이 챙기는 이유는, 내가 남들 시선을 많이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집 근처에 잠깐 나가는 게 아닌 이상, 어딜 가든 후줄근하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내가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이유는, 내가 시간 관리에 철저한(내지는 철저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텅 빈 시간을 텅 빈 상태로 보내는 건, 인생에 대한 결례라고 믿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시간을 메우기 위해, 나는 책을 챙깁니다. 짬나는 시간을 가장 유용하게 보내는 방법이 독서라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다른 것에 게을러지는 건 가끔 괜찮지만, 내가 하는 일에는 항상 착실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꾸준히 뭔가를 읽고 쓰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그러니 매일 독서에 임해야 한다는 규칙이 내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딜 가나 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결국 내 여행 가방 속을 들여다보면, 나라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래 함께할 사람과 여행을 떠나 보라 하는 거겠죠. 여행 짐을 살펴보면 그 사람 생활 방식이 적잖이 드러나니까.

   게다가, 여행은 여행자에게 돌발 상황을 끊임없이 안겨다 줍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만큼 인간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내 주는 것도 없죠.    


   이렇게 말하고 나니, 누군가와 여행 떠나는 일이 조금 두려워지기도 하는군요. 여행을 떠나는 일은 자기 소개서 10장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훨씬 깊은 수준에서 폭로해 버리니까. 물론 이게 두렵기만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의 얼굴을 새로 발견하는 건, 나에게도 유익한 일이니까요. 그런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고, 그 얼굴마저 수용 받는 일은 또 얼마나의 기쁨이겠습니까.    


   당신의 여행 가방 속에 들어갈 물품들을 정확도 높게 예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군요. 당신의 생활 방식에 대해 누구보다 상세히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모든 여행에 기꺼이 동참하며, 당신과 내 본성의 마주침 혹은 부딪침을 즐겁게 견뎌 보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여행 가기 좋은 계절이 언제냐고 당신이 물은 적 있었습니다. 내 마음이 단단한 계절. 내 마음이 건강한 계절. 그런 계절이 여행에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마음이 단단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계절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편이 좋겠구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단단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을 때 먼저 여행을 권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마음이 취약한 계절에는 우리 마음의 무너짐을 담담히 버텨 줄 수 있는 사람과의 여행만이 우리를 도착지까지 무사히 이끌어 줄 테니까.

   당신 마음이 여기저기 조각 나, 그것을 매만지는 사람 손에 피가 맺힐 정도일 때. 그때도 나는 당신의 매일에 나란히 걷고 싶습니다. ‘매일’이라는 당신의 가장 긴 여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축제 같은 여행만 함께하고, 유배流配 같은 여행은 각자 보내자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나는. 당신에게 나는.





책 구매 안내 링크 : www.parkdabin.modoo.at


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나’와 ‘나’가 만나 ‘나’와 ‘너’가 되고, ‘나’와 ‘너’가 어우러져 ‘우리’가 되는 모든 순간들을 담아냅니다. WRIFE MAGAZINE의 시선과 마음과 글이 머무는 곳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책 속 한 문장 :


어른들은 전부 판에 박히고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할 줄은 알면서, 그 삶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우직하고 끈질겼는지 말해 주지 못해 죄송스럽다.

-산문집『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실력이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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