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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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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17. 2017

많은 행복

   국그릇 안에 있던 양파 조각을 뜨다 말고, 호석이 반찬 접시 하나를 집어 든다. 그는 그 접시를 내 밥그릇 근처에 놓아둔다. 호석 옆에 앉아 있는 진해가 눈살을 약간 찌푸린다. 호석은 진해 쪽을 쳐다보지 않고, 다시 숟가락을 쥔다. 호석이 국물과 양파를 같이 떠먹는다. 진해가 나를 잠시 흘겨본다. 장난스러운 눈빛이지만, 나는 그 눈빛 때문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나는 내 밥그릇 뒤에 놓인 반찬 접시를 내려다본다. 그 반찬 접시 안에는 계란말이 네 조각이 담겨 있었다. 계란말이 속에 든 김이 울퉁불퉁한 나선형으로 말려 있다.
   나는 계란말이 접시 귀퉁이에 손가락 끝을 댄다. 접시를 진해 쪽으로 옮겨 주기 위해서다. 호석은 국그릇에 얼굴을 바짝 댄 채로, 나를 올려다본다. 호석과 내 눈이 마주친다. 호석은 무덤덤한 눈길로 내 눈 속 깊이 들어온다. 눈을 한 번 깜빡거린 나는 진해를 바라본다. 진해는 TV를 보고 있다. 호석의 왼손이 계란말이 접시에 닿아 있던 내 손을 치운다.
   계란말이 맛있다는 말도 안 했는데.


   조용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호석과 나는 아파트 밑으로 내려왔다.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는 명목으로. 
   “니가 똑같은 반찬 두 번 연속으로 먹는 건, 드문 일이야.”
   엘리베이터 밖으로 먼저 걸어 나가며, 호석이 말했다. 1층 현관 센서 등은 켜지지 않는다. 현관 바로 앞에 설치된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현관을 희미하게 밝힌다. 현관 바닥에 쏟아진 가로등 불빛에 나뭇잎 그림자들이 새겨져 있다. 
   호석이 잠시 멈춰 서서, 내 쪽을 돌아본다.
   “진해도 계란말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는 호석에게, 내가 말했다. 
   “거 봐. 진해도, 라고 하네. 너도 계란말이 좋아하지?”
   “그 얘기하고 있는 거 아니잖아.”
   “그럼 무슨 얘기 하고 있는데, 우리.”
   “진해 기분 풀어 주러 온 거잖아, 우리.”
   “근데.”
   “근데 계란말이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주면 어떡해!”
   “진해 기분이랑 계란말이랑 무슨 상관인데?”
   “전혀 상관없지도 않을 걸?”
   “내가 진해 기분 풀어 주러 여기 온 건 맞는데, 진해 기분이 어떻든, 난 니 기분이 항상 더 중요해. 그래서 너한테 계란말이 접시 밀어 줬다. 너 그거 잘 먹는 거 같아서. 더 쉽게 먹으라고. 너, 너한테서 멀리 있는 반찬 잘 안 먹잖아.”
   내가 현관 계단을 마저 내려오자, 내 손을 찾아 쥐며 호석이 말했다. 
   “아니, 고마운데, 내가 지금 그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너보다 진해 더 신경 쓰란 얘기야?”
   “오늘은 좀 그러라구.”
   “안 돼, 그건. 그럴 수 있다거나 그러겠다고 너한테 말 못해 줘. 그건 거짓말이니까. 내가 진해를 너보다 더 신경 쓸 수는 없어. 무슨 상황에서든. 니 맘 뭔지는 알겠는데, 니 맘처럼 내 맘이 그렇게 안 돼. 안 되는 걸 난들 뭐 어떡해. 그렇다고 내가 진해 내팽개치고 너한테 밥을 떠먹여 주길 했냐, 뭘 했냐. 고작 계란말이 접시 하나 니 쪽으로 옮겨 줬다. 최대한 참고 참아서, 그거 하나 한 거야, 나. 딱 그 정도만 챙겼다, 너. 그것도 안 돼? 진해가 우리 눈치 볼까 봐, 니 옆에 앉지도 않았어. 진해 옆에 앉았지. 나 그것도 참은 거야. 마음 같았으면 니 옆에 백 번도 넘게 앉았지. 딱 붙어 앉았지. 니 가까이 앉아서 너랑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밥 먹는 게, 나한테 얼마나 귀한 시간인데. 오늘은 참았다고. 나 조용했잖아. 밥 먹는 내내. 너한테 말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넌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진해 안 챙긴다고 핀잔이나 주지?”
   말을 끝내며, 호석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진해가…….”
   “알았어. 내가 더 신경 쓸게. 그래 볼게. 그러려고 나왔잖아, 지금. 너랑 단둘이 좀 있다가 다시 들어가면, 진해 더 챙길 힘 날 거 같다.”
   “내가 그렇게 좋아? 그 정도야?”
   “그런 거 묻지 마.”
   “왜, 듣고 싶어. 얘기해 줘.”
   “안 돼.”
   “왜?”
   “그럼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 진해한테.”
   사뭇 엄숙해진 표정으로 대꾸하는 호석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길 건너편 마트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무튼, 아무튼, 사랑 받는 느낌은 좋네.”
   밤공기를 한가득 들이쉰 뒤, 내가 말했다. 호석의 손이 내 손에 깍지를 낀다.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받기만 해. 받기 싫으면, 그것도 안 해도 돼. 내가 니 앞에 다 놓고 갈게.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써.”
   깜빡거리는 보행자 신호등을 지나치며, 호석이 중얼거렸다.
   “뭘?”
   “뭐긴 뭐겠어.”
   “뭐가 뭔데?”
   “자꾸 묻지 마. 위험해, 지금.”
   호석의 말에,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마트 앞에 놓인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한 손으로 꺼내 들며, 호석이 나를 따라 웃는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이런 날에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다가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게, 이 사람과의 매일이라는 생각.


   “다행이라고 할 때, 그 다행의 뜻이 뭔 줄 알아?”
   채소 코너를 둘러보다가, 호석이 내게 물었다.
   “몰라. 뭔데?”
   “다행多幸의 다多는 뭐가 많다는 뜻. 행幸은 행운, 행복, 희망, 즐거움, 뭐 그런 뜻. 뭐가 어째서 다행이라고 하는 건, 뭐가 어째서 많이 행복하다는 의미야. 운이 많이 좋다는 의미보다는 많이 행복하다는 의미가 더 좋은 거 같아서,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는데. 아까 니가 밥을 잘 먹길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너 요즘 입맛 없는 거 같았는데. 니가 밥 잘 먹는 거 보니까, 나는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고. 많이 행복했어. 너는 다행이야. 너는 많은 행복.”
   “뭐야, 뜬금없이.”
   “하루 이틀이냐? 아이스크림 뭐 먹을래? 작은 거 여러 개 사 갈까, 아니면 통에 든 거 한두 개 사 갈까? 너 과자에 아이스크림 얹어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통에 든 거 사자.”
   그렇게 말한 호석은 걸음이 느려진 나를 잠시 뒤에 두고,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으로 다가선다.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열리자, 새하얀 김이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너는 다행이야. 너는 많은 행복.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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