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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18. 2017

파란색 도자기 컵

   예전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 한 토막이 떠올랐다. 유치원에 처음 들어간 아이들이나 새로운 유치원으로 옮긴 아이들 가방 안에는, 집에서 쓰던 장난감들이나 담요가 들어 있기 일쑤라고. 아이가 유치원에서 보낼 생소한 시간을 되도록 원만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학부모들이 그 장난감들이나 담요를 가방 안에 넣어 준다고. 친숙함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그 물건들을 함께 보낸다고.
   그 얘기가 불쑥 떠올랐을 때, 나는 어떤 그릇 가게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앞에서 걸음이 슬며시 멈춰지던 중이었다. 살던 곳에서 가장 먼 데로 떠나 온 참이었고, 희미한 감기 기운 같은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너의 집은 주방이고 거실이고 할 것 없이, 온갖 컵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쇼윈도에 얼굴을 바짝 대고 컵들을 구경했다. 네가 가장 아끼는 그 파란색 컵과 닮은 컵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컵도 파란색이었다. 네가 가진 컵보다는 좀 옅은 색이긴 했지만.
   그건 너에게 사 주고 싶은 컵이 아니었다. 그건 이 여행 내내 내가 가지고 다니고 싶은 컵이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유치원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아이 같은 마음으로, 유치원 가방 깊숙한 데서 낡고 낯익은 캐릭터 담요를 꺼내는 마음으로, 그렇게나마 집과 엄마와 함께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 파란색 컵을 사다가 어디든 들고 다니고 싶었다. 
   언제 너는 내 집 같은, 내 엄마 같은 사람이 되었나. 그런데 가만 돌이켜보니,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라는 생각. 
   마음이 꽤 큰 폭으로 흔들거릴 때마다, 나는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료를 찾아 먹었다. 핸드폰을 꺼내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검색한 뒤, 그걸 2절 끝까지 듣기도 했다.
   엄마가 너를 알게 된다면, 아니, 내가 너를 그렇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약간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앓던 이를 시원하게 빼 버린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결국 그 컵을 샀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컵의 손잡이는 부러져 있었다. 가방 안에서 뭔가와 부딪치는 바람에 그렇게 된 듯했다. 그 컵을 건네받으며, 너는 “얘 상태 왜 이래?” 하고 물어 왔다. 나는 그 컵이 선물이 아니라는 말만 내뱉고, 거실로 휙 나와 버렸다. 
   너는 곧장 싱크대 앞으로 가더니, 수세미로 그 컵을 씻었다. 그러면서 “이런 건 처음 받아 봐. 손잡이 부러진 컵이라니. 사포로 날카로운 데 좀 다듬으면, 사용하는 데 아무 문제없을 거 같은데. 특이해서 예쁘네. 근데 이거, 나 쓰라고 준 건 맞지? 나 이거 쓴다?” 하고 말했다.


   여행 내내 들고 다니던 너의 조각을 비로소 너에게 돌려준 기분이 들었다. 개운했다. 물론 그 컵은 너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아니다. 너의 일부가 아니다. 그 조각 없이도 너는 이미 온전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컵이, 꼭 너에게 되돌아가야 하는 너의 조각인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 컵은 내게 너의 역할을 톡톡하게 해 주었다. 
   말 한 마디 못하고 나를 안아주지도 못하지만, 그 컵이 있었던 덕분에,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잠들지 않을 수 있었다. 새벽에 벌떡 깨어나, 여행지 숙소의 낯선 풍경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었다. 모르는 이들의 외국말 같은 시선들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다.


   너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이 너였다. 너의 눈 없이도, 항상 차갑지만 단단하던 너의 손 없이도, 내게 늘 열려 있던 너의 품 없이도, 그 모든 것들이 너였다.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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