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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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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20. 2017

사고

   나는 피나 상처 같은 거 못 봐요. 
   언젠가 그렇게 말하던 네 목소리가 떠올랐다. 부서진 버스 정류장 뒤편으로 내가 나동그라지자마자. 
   네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몸 반쪽이 마비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길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았는데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내가 인도 안쪽으로 밀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 엄마는 내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꾸라져 있는 내 뺨을 두드리며 “119!”를 거듭 외칠 뿐이었다. 아이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아까 달려오던 차에 치인 걸까. 아니면, 차가 들이받아 무너진 버스 정류장에 세게 부딪친 걸까. 알 수 없었다. 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까는 몸이 절반 정도만 마비된 줄 알았는데. 
   팔뚝과 목덜미 그리고 배에서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고통은 느낄 수 없는데, 온도나 질감 같은 건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똑바로 떴다. 그런데 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눈 좀 떠 봐!” 하고 소리쳤다. 귓속에서 뭔가 윙윙대는 소리가 났다. 
   너는 길 가던 몇 사람과 나를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왔다.
   나는 피나 상처 같은 거 못 봐요.
   네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너를 찾았다. 너는 내 머리맡에 있었다. 네 손이 내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네 손의 감촉과 네 손의 온기와 아까 그 미지근한 액체의 미끈거림이 동시에 느껴졌다.
   “보지 마. 저리 가.”
   내가 말했다. 제대로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팔뚝에 박힌 유리 빼야 되는 거 아니에요? 더 깊이 박히면 어쩌려고.”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때 네가 그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치며 “제가 할게요.” 하고 말했다.
   제가 할게요.
   나는 피나 상처 같은 거 못 봐요.
   어쩌자고 너는 그 흉한 상처를 만지려 하나. 피도 상처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사람이. 나는 골치가 아팠다. 
   “가라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게 해.”
   굳어지고 어쩐지 퉁퉁 부은 것 같은 입술을 움직이며 내가 말했다. 너는 내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너를 볼 수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그쯤 되니 상반신의 감각이 차츰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유리 조각들이 박혀 있지 않은 오른팔을 들었다. 높이 들 수는 없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네 손인 듯했다.
   “가만히 있어.”
   네가 말했다.
   “가라니까.”
   아까보다 분명해진 목소리로 내가 대꾸했다.
   “아, 왜 자꾸 가래, 진짜! 조용히 해!”
   “못 보잖아. 보지 마. 상처 보지 마. 나 보지 마.”
   “바보야? 못 보긴 뭘 못 봐! 이건 다르잖아! 아, 말하지 마, 제발. 말할 때마다 목에서 피 나와. 말하지 마.”
   네가 애원하듯 말했다. 갑자기 눈이 뜨거웠다. 눈알 속 압력이 최대치로 치솟는 것도 같았다. 네가 다시 내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팔에 박힌 유리 뺄 거야. 그리고 옷으로 팔 묶어서 지혈할 거야. 아플지도 몰라. 목에 박힌 유리는 못 빼. 피가 너무 많이 나올 거 같아. 혈관 지나가는 자리에 박힌 건 원래 빼는 거 아니래. 아플 거야. 조금만 참아.”
   그렇게 말하는 네 얼굴은 창백했다. 넋이 반쯤 나간 사람 같았다. 반 이상이거나. 잘게 부서진 눈물방울들이 네 속눈썹에 맺혀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눈을 얼마나 많이 깜박거렸길래. 
   팔에다가 뭔가를 비비는 느낌이 났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냥 팔의 살점이 묵직해지고 단단해지는 것만 같았다. 너는 내 눈이 아닌 내 이마나 정수리 쪽을 쳐다보며 “아파? 아파?”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고개가 움직여지질 않아서, 눈만 한 번 감았다 떴다. 네가 다시 내 머리 위쪽을 바라보며 “미안해.” 하고 말했다. 방금 내 눈짓은 아프지 않다는 눈짓이었는데, 많이 아프다는 눈짓으로 읽힌 모양이었다. 
   뭐가 다를까. 나는 아까 네가 한 말, “이건 다르잖아!”라고 하던 말을 되새겼다. 
   다르긴 뭐가 달라. 그렇게 울고 있으면서.
   나는 구급차가 빨리 오기를 바랐다. 한시라도 빨리 네가 없는 곳으로 내가 옮겨지기를 바랐다. 
   네 손바닥에, 네 손톱 속에, 네 옷에 묻어 있을 내 피가 상상되었다. 그 상상이 나를 아프게 했다. 다른 게 아니라, 그 상상이. 
   팔뚝 위쪽이 끈 같은 걸로 묶이는 느낌이 났다. 이제 눈앞은 캄캄했다. 얼굴 왼쪽이 뜨끈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귓바퀴는 약간 따가웠다. 어떤 사람이 “이제 기다립시다.” 라고 말하자, 또 다른 사람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우는 사람을 달래 줄 수가 없었다. 누가 우는 줄 뻔히 알면서도. 
   빛 한 점 들지 않는 바닥 속으로 계속 빠져드는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내게서 서서히 멀어져만 갔다. 
   누가 내 쪽으로 고함을 치는 것 같은데, 그 고함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주 긴 플라스틱 파이프 건너편 구멍에 입을 대고 있는 누군가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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