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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21. 2017

갑작스럽게

   “누군가를 내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는 거야.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 가장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 그걸 제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야. 비극 같니?”

   그 말을 너에게서 듣고, 그런 너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온 나는 갑자기 가빠져 오는 숨을 골랐다. 더운 바람이 무겁게 불어와, 뺨과 목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모기에 물린 것도 아닌데 손등이 간지러웠다.

   “함께인 줄 알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함께인 게 아닌 거야. 조금도 아니고 많이 떨어져 있는 거야. 떨어져 있는데 서로 다르기까지 한 거야. 알고 봤더니 지긋지긋할 만큼 달라. 종이 퍼즐은 억지로 끼우면 어떻게 끼워지잖아. 그런 것도 안 돼. 아예 안 맞물려. 그런 사이인 거야. 그걸 제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야. 도망치고 싶을 걸.”

   나처럼 그 자리에서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네가 또 말했다. 나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너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오기가 생겨서 네 쪽으로 다시 다가갔다.

   헤어지자는 거야, 뭐야.

   “달콤하지만 달콤하지 않아. 따뜻하지만 따뜻하지 않아. 재밌지만 재밌지 않아. 절박하지만 절박하지 않아. 그립지만 그립지 않아. 갖고 싶지만 갖고 싶지 않아. 잃을까 봐, 멀어질까 봐, 두렵지만 두렵지 않아. 서로가. 심지어 행복하지만 행복하지 않아. 그 이도 저도 아닌 상태 속에 수없이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며칠에 한 번씩 미칠 것 같이 만드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게 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 현실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 현실이 사랑이야. 마음 한 쪽이 막 답답할 걸.”

   내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그러는지, 말을 맺던 너는 다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이 모든 걸 너를 통해서 알게 됐어. 이 말이 너한테 죄책감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근데 자기가 그 사람한테 부적합한 사람 같다고 계속 느끼도록 만드는 게, 결국 제일 열렬한 사랑이더라. 열애라는 게, 그렇게 너저분한 것이기도 하더라. 걸어서 옆집까지 가는 거랑, 비행기 타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는 거랑, 아무래도 같을 수가 없는 거겠지. 준비도 많이 못했는데, 아니, 전혀 못했는데, 달랑 마음 하나만 챙긴 상태인데, 갑자기 그만큼 멀리까지 가 버리는 거라서, 나는 계속 의문을 품게 됐어. 이렇게 가도 되나. 이만큼 가도 되나. 이렇게 가다가 나는 어떻게 되나. 돌아올 수는 있나. 아니, 거기서 돌아와 버리면 어떻게 되나. 아직은 돌아오지 않고 싶은데, 사실 영영 돌아오고 싶지 않은데,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나. 사랑으로 도달하는 동안에, 사랑 안으로 들어간 후로도, 사랑 안에서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는 와중에도, 나는 그렇게 내내 앓았어. 24시간 빈틈없이 앓은 건 아니지만, 틈틈이 앓았어. 그래서 비극 같았어. 도망치고 싶었어. 답답해 죽을 것 같았어. 고작 그런 게 사랑이라. 근데 그게 고작이 아니더라. 그 현실이 사랑이야, 라고 내가 방금 말했던 거 기억나지? 현실은 현실대로 두고 사랑은 사랑대로 두는 건, 땅은 땅대로 두고 나무는 나무대로 두는 거 같아서, 나무가 자랄 수가 없어.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영양분을 빨아들이지도 못하니까. 그 현실이 사랑이야, 라고 하는 사람은 나무를 땅에다가 심어 넣은 사람이야. 무슨 뜻인지는 니가 좀 더 생각해 봐. 그 현실이 사랑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야. 고작 그런 사랑이 아니야. 제일 힘든 부분을 이겨낸 사랑이야. 왜 그게 그런 사랑인지는 니가 좀 더 생각해 봐. 지금 나는 여기까지 와 있어.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너는 얼마나 온 건지, 어디까지 온 건지, 물어 보고 싶기도 했고.”

   오래 열려 있던 네 입술이 닫혔다. 장난을 끝내려는 사람처럼 싱겁게 웃으며, 네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 발, 두 발, 세 발.

   “니가 꿈에서 깨어나도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나는 꿈꾸는 중이 아니라서.”

   그게 오늘 준비한 마지막 말인지, 말을 끝낸 너는 숨을 한참 들이켰다.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긴장할 때마다 내 모든 감각은 손으로 다 쏠려 버리는데, 나는 무엇으로 인해 긴장한 것이었을까.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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