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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22. 2017

재결합

   국경은 개념일 뿐이라는 말, 세계지도의 땅 색깔은 모두 같은 색깔로 칠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땅 사이사이의 모든 선은 지워져야 하고. 
   그 말, 사실이긴 사실이었다. 땅 자체는 땅일 뿐이었다. 네 땅과 내 땅을 나눈 건 사람들의 일이었고. 
   그런데도 나는 너의 말과 너의 말 속에 든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땅이 모조리 황토색으로만 칠해진 세계지도, 경계선이 하나도 그어져 있지 않은 세계지도를 상상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나는 손톱을 세워 아랫입술을 긁었다. 
   “모든 분리는 허상이야. 환영이라고. 실체가 아니라 견해일 뿐이라고. 그냥 약속이나 합의 같은 거야. 맞잖아.”
   국경은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하던 네가 다시 말했다. 철학자처럼 열띤 어조로. 무엇인가를 확고하게 믿고 있는 눈빛으로.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입술에서 뗀 손을 테이블 위에 얹으며, 내가 물었다.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온통 황토색 범벅인 세계지도를 대화에 끌어들인 이유가 뭔지. 
   네가 무엇에 그토록 열을 올리고 있는 건지. 무엇을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건지.
   내 질문이 기습적이라고 느낀 건지, 너는 잠시 멍해져 있었다.
   “세계 사정 같은 거에 관심 없잖아, 너. 근데 너는 그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했어. 본론이 뭐야? 세계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 너. 세계 얘기는 그냥 비유였잖아. 본론을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아니야?”
   내가 다시 물었다.
   “지워도 된다고.”
   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지워도 된다고?”
   “니가 우리 사이에 아무리 선을 그어도, 그 선이 진짜 선이 될 수는 없는 거라고. 모든 분리는 진짜가 아니라 생각일 뿐이라고. 사람 사이의 연결은 그런 거라고. 한 번 연결된 사이는 한 덩어리로 된 땅 같은 거라고. 그냥, 뭐…….”
   너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이번에 멍해진 쪽은 나였다. 
   “이쪽으로 넘어와도 돼. 다시 그래도 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래도 돼. 그런다고 니가 어기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고개를 툭 떨어뜨리며, 네가 다시 말했다. 너에게 무슨 반응이라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막 느껴지던 무렵, 별안간 고개를 치켜든 네가 입을 열었다.
   “난 한 번도, 우리가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니 옆에 계속 남아 있을 명목이 친구 사이여서, 그뿐이어서, 그런 척한 것뿐이야. 1년 넘게. 근데 너 요 며칠, 나한테 흔들려 하는 거 같더라. 그렇게 흔들려 하는 거 때문에 너 자신이랑 갈등하는 거 같더라. 그게 아니라면, 너 왜 자꾸 내 시선 피했냐? 왜 나 발견하고는 나 없는 길 쪽으로 둘러서 걸어갔냐? 왜 일찍 집에 간다 그러고 술 마셨냐? 어지간히도 마셨더라. 이봐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니 마음이 내 쪽으로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면, 그래서 니가 나한테 내어 줄 여지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여지 붙잡고 늘어질 사람이 난데.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 난 이런 걸로 모른 척 안 해. 너도 모른 척 그만해.”
   “내가 뭘 모른 척하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너한테 묻지 누구한테 물어? 니가 방금 그랬잖아! 내가 모른 척하고 있다고!”
   “너 무섭잖아. 다시 나한테 왔다가, 또 뭐가 다 잘못될까 봐. 니 마음 모른 척하고 있잖아.”
   “점쟁이 나셨네.”
   “아니면 아니라고 해. 그럼 되잖아. 여기서 점쟁이가 왜 나와. 비꼬면서 말 돌리지 마.”
   “…….”
   “내 마음도 모른 척 좀 그만해. 마음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인 척 진짜 못해, 너. 형편없어. 정확히 해 둘 게 있는데, 지금 너더러 나한테 오라고 하는 게 아니야. 와도 된다고 하는 거야. 그게 아무 잘못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니 마음 때문에 니가 스스로 죄 짓는 거처럼 느끼면, 나한테 약간 걸쳐져 있는 니 마음 보는 내 마음은 어떻겠냐?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여기로 오지도 못하면서 니가 시도 때도 없이 괴로워하면, 그런 너 보는 내 마음이 어떻겠어? 툭 깨놓고 말해서, 그냥 막 좋아야 되는 거 아니냐? 다시 좋아진 거면, 그냥 좋아하면 되잖아. 나 다시 좋아진 거 때문에 왜 자꾸 널 못 살게 굴어? 나 사실 다 들었다. 너 효진이한테 술 마시고 한 얘기.”
   “미쳤어, 김효진.”
   “오라고 하는 게 아니야. 와도 된다고 하는 거야. 오고 싶은 마음, 오고 있는 중인 마음 때문에 너 괴롭히지 말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너 계속 들쑤실 거면, 야, 차라리 나한테 오지 마. 나는 너 내 옆으로 질질 끌고 올 생각 조금도 없으니까. 너 아프게 하면서까지 너 내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고, 나는. 나 친구인 척 잘해. 넌 모른 척 잘하고. 그렇게 잘 지내 왔잖아, 우리. 계속 그렇게 지낼 수 있어, 난.”
   “뭐지? 니 마음 다 알았으니까, 이제 세게 나간다, 이건가?”
   “급해지지 말라고. 니 마음 때문에 니가 당황스럽다면, 당황스러워 하라고. 충분히 그렇게 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너한테 벌 좀 주지 마. 넌 너한테 너무 엄격해. 뭐가 그렇게 규칙이 많냐, 너는? 그 규칙 다 지킨다고 해서, 상처 하나도 안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보기에, 너는 니가 정한 규칙 때문에 제일 큰 상처 받아.”
   “아유, 시끄러워.”
   “더 떠들어 달라고 사정해도 이제 떠들어 줄 수가 없다. 나 들어가 봐야 돼.”
   “알았어. 들어가.”
   “친구 해?”
   “응?”
   “지금부터 다시 친구로 돌아가? 아니면 어색하지만 계속 이 상태로 있을까. 나 말이야. 너한테. 친구 해?”
   “일단 들어가.”
   “그런 옵션은 없어.”
   “친구는 아니야, 근데…….”
   “그래, 그럼 2번이네.”
   “아, 너 가, 빨리. 사라져.”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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