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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25. 2017

소원 종이


   회사에서 나와 공원 쪽으로 걷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평소보다 길게 잡혀서, 잠깐 산책하면 좋을 것 같았다. 오전에 비가 잠깐 내린 덕분인지, 촉촉하고 선들선들한 바람이 불었다. 

   담배 냄새 자욱한 사거리에서 버스 두 대가 엇갈려 지나갔다. 파란색 버스 옆구리에 붙은 광고판에 중국 관광지 사진이 박혀 있었다. 나도 그 관광지에 가 본 적 있다. 2년 전쯤이다. 

   그곳은 커다란 절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외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가족들 모두 꼭두새벽부터 그 절을 찾았다. 나는 눈곱 한 쪽도 제대로 떼지 못한 상태로 그곳에 끌려갔다. 내 입은 나팔처럼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왜 중국까지 와서 쓸데없이 절 같은 데를 오냐고, 이게 싸구려 패키지여행이랑 다를 게 뭐냐고 내가 투덜대자, 엄마는 내 지갑과 여권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런 엄마 뒤에서 나를 쳐다보며 낄낄대던 오빠.

   그 절 구석에, 소원 비는 용도로 지은 조그만 건물이 있었다. 외할머니와 엄마, 아빠, 오빠는 법당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그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자꾸 툴툴대려는 입을 간수할 수가 없어서, 잠시 피신한 것이었다. 비행기를 오래 탄 것도 아닌데 허리와 등이 쑤셨고, 전반적인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하고 한바탕 싸우기 딱 좋은 날이었다. 그러니 가족들과의 거리가 필요했다. 모처럼 만의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건물 안은 샛노란 종이들로 가득했다. 저마다의 소원이 적힌 그 종이들은 건물 천장에서 바닥까지 늘어뜨려진 얇은 밧줄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건물 가운데쯤에서 우리나라 말로 적힌 소원 종이를 발견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떤 일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아직 좀 어린 거 같은데, 이런 걸 벌써부터 시작해도 되려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뭔가를 시작할 때마다 ‘지금에서야 이런 걸 시작하다니, 너무 늦은 거 아닐까.’ 싶은 막막함에 사로잡힌다. 적당한 나이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 그렇게 미루던 시작을 이제는 포기하고 있다.」

   읽고 보니, 소원 종이가 아니었다. 소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왕 쓸 거면 소원이나 적지 웬 푸념을 적었대,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푸념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다. 나이가 좀 더 들면 하기로 했던 것들을 하나씩 단념해 가고 있던 중이었다. 늘 어리기만 하다가 난데없이 폭삭 늙어 버린 것 같은 기분에 계속 걸려 넘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 어중간한 상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이.

   “최정윤.”

   나는 그 푸념 종이 맨 아래에 적혀 있던 푸념 주인의 이름을 가만히 발음해 보았다. 

   “뭘 하고 싶었던 거야.”

   오래된 나무나 짚 냄새 같은 걸 한껏 들이켠 뒤, 내가 다시 중얼거렸다. 최정윤에게 묻는 말이었다. 

   뭘 포기했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뭘 하고 싶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내뱉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 말을 믿지 못해서.

   “늦어도 괜찮다고 해 주는 뭔가를 만나자, 우리.”

   그 말을 웅얼거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오빠가 나타났다.

   “야, 엄마가 너 찾아. 니 지갑이랑 여권 태우는 거 보여 주려나 봐. 그런 거 어디서 쉽게 못 보는 거다. 얼른 가서 구경해.”

   오빠가 능청을 부리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내 혼잣말은 못 들은 눈치였다. 

   “여기 우리나라 말로 적힌 거 있어.”

   내가 최정윤의 푸념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내 옆에 다가선 오빠가 최정윤의 푸념 종이를 읽어 내렸다. 

   “뭔데, 소원 아니네.”

   “그러게.”

   “나가자고.”

   “오빠는 그런 거 없어?”

   “뭐?”

   “살다가 포기한 거.”

   내가 묻자, 오빠는 등을 한 번 쭉 펴고 내 눈을 쳐다보았다.

   “왜?”

   오빠가 왜냐고 물었다.

   “왜라니?”

   “왜 묻냐고.”

   “그냥 궁금해서.”

   “몰라. 말하기 싫다. 나와, 얼른.”

   말끝에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오빠가 뒤돌았다. 

   “사람이야?”

   오빠의 뒤통수에 대고 내가 소리쳤다. 내가 아니라 내 직감이 소리쳤다. 운동화를 구겨 신던 오빠가 “어.” 하고 대답했다. 

   “늦어도 괜찮지가 않네요, 그건. 미뤘든 포기했든.”

   최정윤의 푸념 종이에서 손을 떼려던 내게, 오빠가 말했다. 소원 종이 더미 때문에 오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오빠의 발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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