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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29. 2017

비밀을 나누고 싶은 사람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 귀가 자신의 입 옆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라. 끝내는, 끝끝내는 그 이야기가 그 사람 귀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느냐 하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인간관계의 유일한 비밀은 비밀 같은 게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폭로되지 않은 모든 비밀이 아무에게도 발설되지 않은 비밀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지.

   진 교수 아들 방 벽에 붙어 있던 쪽지에 그 글이 적혀 있었다. 글의 출처는 진 교수인 듯했다. 그 글의 글씨체도, 말투도, 모두 진 교수 것이었다.

   진 교수 아들 방에서 나오자마자, 진 교수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벙긋 웃어 보이자, 그녀는 “차 드세요.” 하고 조용히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구경 다 했나?”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진 교수가 내게 물었다. 나를 지나쳐 간 그의 시선이 주방에 닿았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하얀색 찻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찻잔 안에 담긴 차들은 모두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시큼한 향기가 맡아졌다. 

   “아들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진 교수 옆에 앉으며, 내가 물었다. 

   “열여덟.”

   찻잔 하나를 내 쪽으로 밀어 주며, 진 교수가 우물거렸다. 내가 별다른 대꾸 없이 찻잔을 들자, 진 교수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여전히 지키질 못해.”

   찻잔에 입술 안쪽을 붙인 채로 내가 말했다.

   “뭘?”

   “뭐겠나?”

   내가 되묻자, 진 교수가 자신의 아들 방 쪽을 쳐다보았다. 진 교수의 눈과 미간의 폭이 약간 좁아졌다. ‘아들 나이가 몇이지?’ 묻다가 뜬금없이 ‘나도 여전히 지키질 못한다.’는 엉뚱한 말을 내뱉은 내 속내를 헤아려 보려는 듯했다.

   “비밀 말이야.”

   왼손 중지와 엄지를 맞부딪쳐 짧은 소리를 내며, 진 교수의 시선을 끈 내가 말했다. 진 교수의 입이 ‘아.’를 발음하는 모양으로 변했다. 진 교수가 다시 자신의 아들 방 쪽을 힐끔거렸다.

   “민망하게.”

   콧등 아래로 약간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며, 진 교수가 말했다.

   “뭐가?”

   “자식한테 안달복달하는 부모처럼 보였겠군.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일거수일투족 다 간섭하고. 이런 길로 가야 한다, 저런 길로 가야 한다, 아니면 옳은 사람이 될 수 없다, 하는 식으로 자식 몰아세우고.”

   “자학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모든 종류의 자학은 일정 분량의 사실을 포함하네.”

   “그렇다 한들, 자학은 자학이네.”

   “뭐, 그런가.”

   “부모로서의 자네 자질 심사나 하자고 그 얘기 꺼낸 거 아니야.”

   내 말이 끝나자, 베란다 너머에서 새 울음소리가 넘어왔다. 진 교수 집이 깊은 산 속에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깨우쳐졌다. 찻잔 테두리에 검지를 얹고 있던 진 교수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내 자질 대신 자네 자질을 의심하는 건가? 어째 그런 뉘앙스 같은데.”

   “내 자질을 의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의문이 들었어. 자네가 적어 놓은 그 문구를 보니 말이야.”

   “무슨 의문?”

   “나도 살다가 문득 알게 됐네. 내 입에서 떨어지는 말들 대부분이 또 어딘가에서 언급되리라는 사실을. 근데 좀 더 살다 보니, 그 사실에 반감을 가지지 않게 되더라고. 나를 배신할 생각이 없거나, 나한테 악감정 없는 사람도 내 말을 여기저기 옮길 수 있다는 걸 수없이 학습했기 때문에. 비밀 유지가 어렵다는 건 짜증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거야. 그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거야. 근데 그걸 알면서도, 비밀이라는 것의 수명이 엄청나게 짧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얘기를 마구 하게 돼. 그게 어딘가에 전해졌을 때 약간의 해프닝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어떤 얘기들을 입 밖에 내 놓게 된다고. 자네가 그 문구 속에서 말했었지. 우리는 폭로되지 않은 비밀이 아무에게도 발설되지 않은 비밀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고. 근데 말이야. 그 착각이 깨진 곳에 사는 나는, 내 비밀이 금세 발설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내 비밀을 어딘가에 털어놓고 말게 돼. 이게 내 의문이야. 나는 어째서 이럴까.”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비밀이라는 건,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기 좀 어려운 나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비밀도 나의 일환이라고. 내가 가진 약간 누추한 부분. 나는 그것마저 안아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내 안에 있던 어떤 비밀을 누군가와 끊임없이 공유하는 걸까. 내 꾀죄죄한 부분을 보고 도망칠 사람들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사람에 대한 갈증은 풀리지 않나 보군.”

   내가 말을 마치자, 진 교수는 몸을 뒤로 기울여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묻었다. 진 교수의 가느다란 두 팔이 진 교수의 아랫배를 감쌌다. 

   “그럼,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 사람이라는 게 어쩌면…….”

   진 교수가 말끝을 흐렸다. 다시 새 울음소리가 거실로 새어들었다. 아까 들었던 울음소리와는 다른 소리였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고스란히 수용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표현이자, 그 기대에 대한 일종의 시험 아니겠나.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 정도 차 있을 때, 나는 내 비밀을 좀 더 쉽게 내놓을 수 있었네. 그런 약간 어수선한 비밀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까닭인지.”

   말을 맺은 내가 진 교수 어깨를 툭 건드리자, 진 교수가 빙긋 웃었다.

   “나는 준비돼 있네. 언제든.”

   내가 건드린 쪽 어깨를 살짝 들먹이며, 진 교수가 말했다.

   “뭐가?”

   “뭐겠나?”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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