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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31. 2017

너 선수야?


   8년 전 여름이었다. 막 스무 살이 되었던 언니가 형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정식으로 사귀고 싶다고. 창문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검은색인 카페와 폐점된 백반 집 사이 골목에서였다. 비가 올 모양인지, 비릿한 냄새가 떠돌기 시작한 즈음.

   고장 난 가로등처럼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형부는 골목 저편을 바라보며 “대답하기 어렵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 뒤 다시 걸어 나갔다. 언니는 일단 고백을 끝냈다는 안도감과, 고백 결과에 대한 불안감에 겨워, 형부에게 분명한 대답을 요구하지 못했다. 조용히 형부를 뒤따라 걷다가, 형부와 어찌어찌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 형부가 언니에게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다른 대안들을 충분히 겪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다양하게 겪어 봐.」

    그 메시지를 받고 언니는 많이 울었다. 터질 것처럼 부어오른 눈을 간신히 뜨고 내 방에 들어온 언니가 그 메시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거절이지? 나 이 사람한테 거절당한 거지?” 하고 물으면서. 형부를 좋아하는 자기 마음이 형부에게 부담 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던 언니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형부가 자기 마음을 당장 받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만 남아 있었다.

   나이 차이, 문화 차이에 대한 극복은 오직 자신만의 몫이었던 양, 언니는 형부를 괘씸스러워 했다. 내가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좋아한다고 고백한 건데, 어떻게 그런 나한테서 뒷걸음질 칠 수 있는 거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냐고.

   내 손 안에 있던 자기 핸드폰을 다시 가져가며, 언니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못나 보이는 것 이상으로 형부가 싫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형부 가슴팍을 밀치고 “이 나쁜 새끼!” 하며 소리치는 상상을 했다.

   나는 붙잡고 있던 문제집과 볼펜을 책상 뒤쪽으로 내팽개치며, 형부를 욕하기 시작했다. 평소 때는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을 만큼 밉던 언니였지만, 막상 언니가 고통스러워 하니 속이 아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핏줄이 뭔지.

   그 날 이후로 언니는 형부를 모른 척했다. 형부 앞에서만.

   언니가 보기에, 형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라고 했다. 언니에게 눈인사를 종종 보내기도 했고, 밥도 잘 먹고 다니고, 피부가 푸석해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눈에 실핏줄 하나 터지지 않았다고. 언니는 그런 형부에게 화가 단단히 났다. 그런 형부가 싫다고, 싫다고 했다. 형부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로부터 두어 달 지난 무렵, 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언니는 그 사람과 형부를 요목조목 비교하며, 형부보다 그 사람이 백 배 낫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곧, 언니는 그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 사람을 형부에게 소개시키기도 했다. 그 사람을 형부에게 소개시키고 온 날, 언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웠다. 언니는 그 사람에 대해 떠들지 않았다. 언니는 여전히 형부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그 사람과 언니를 함께 바라보던 형부의 눈빛에 대해. 그 사람에게 건넨 형부의 말들에 대해. 언니에게 건넨 형부의 축하에 대해.

   나는 그 날 알았다. 언니가 그 사람을 형부보다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형부가 보냈던 문자 메시지로 인해 생긴 오기 때문에 그 사람과 사귄 건지도 모른다는 것을.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른 대안 필요 없으니 그냥 사귀면 안 되냐고 하며 형부를 붙잡지도 않으면서, 형부한테서 신경을 완전히 끊어내지도 못하는 언니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니도 언니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아닌 듯했다. 

   형부 마음이 궁금했다. 언니가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형부 마음을 알 길은 없었다.  

   언니와 그 사람의 연애는 금세 종지부를 찍었다. 언니는 실연의 아픔에 대해 위로를 받고 싶다는 이유로, 형부와 자주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내게 “이 사람한테 다시 고백하면, 나 너무 값싸 보이려나?” 하고 이따금 물었다. 나는 언니를 말렸다. 다시 고백하지 말라고. 값싸 보이고 말고 하는 건 전혀 문제 되지 않지만, 언니가 형부한테서 더 큰 상처 받는 건 문제가 된다고. 언니는 “아니야. 더 상처 입을 자리도 없어. 이미 아플 대로 아파 봐서, 더 아플 것도 없다구.” 하고 말하며, 내 만류를 가만히 뿌리쳤다.

   그런데 언니는 형부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형부가 고백의 기회를 가로채 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자꾸 흘리고 다니냐. 사람 아무것도 못하게. 그것도 능력인가. 뭐, 너 선수야?”

   형부가 언니에게 고백하던 날, 언니를 만나자마자 형부 입에서 떨어진 말이었다. 형부는 화난 기색이 완연했다고 한다. 언니는 벌게진 형부 얼굴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화를 낼 만큼 언니에게 관심 쏟고 있는 형부 때문에. 감격도 했다고 한다. 자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했다는 형부의 말은 눈앞을 아득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장은 그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좋았다고 한다. ‘내가 이 사람한테 이 정도로 이런 사람이었다구?’ 싶어서. ‘이 정도로 이런’이 정확히 뭔 줄은 언니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걸 ‘이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으로 해석했다.

   “흘리긴 뭘 흘려요?”

   바싹 마른 낙엽처럼 풀썩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언니가 형부에게 되물었다.

   “주려면 그냥 주든지, 흘리긴 왜 흘려. 사람 속 타게.”

   “그러니까 뭘?”

   “아, 마음을! 마음!”

   “안 받겠다더니.”

   “안 받으려던 게 아니야.”

   “받으려면 그냥 받든지, 안 받으려던 게 아닌 건 뭔데요?”

   “몰라, 그땐 그냥 너랑 사귀는 게…….”

   “내 마음 받아 줄 만큼 나 좋아한 건 아니어서.”

   “아니야.”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좋아하니까. 당장 사귀면 너 너무 빨리 잃을 것 같아서. 그게 싫어서 자꾸 미뤘다. 근데 넌 연애도 하고, 잘 살더라. 남의 속은 다 뒤집어 놓고.”

   “내가 잘 살았다구요? 허! 내가 할 말인데, 그건.”

   “내가 잘 살았다고?”

   “잘 살았잖아요!”

   “와, 그걸 어떻게 잘 산 걸로 보냐.”

   “그것도 내가 할 말이네요.”

   언니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겼다. 아무튼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둘은 사귀기로 했단다. 사귀기 시작하고 한 계절이 다 지날 때까지, 둘은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에 대한 토론으로 바빴다. 누구도 자신이 마음을 덜 졸였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둘은 신기해했다. 자신한테는 너무 잘 알아차려지는 마음의 고통과 갈망이 상대한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상대에게 상처 받고 싶지 않다는 의식보다, 이미 상대에게 상처 받았다는 피해 의식이 더 커져서, 자기만 괴롭고 상대는 멀쩡히 살아간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지낸다는 것에. 제대로 의사소통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대와의 관계를 무작정 비관하게 된다는 것에. 

   지금도 언니와 형부는 가벼운 말다툼을 종종 벌인다. 누가 마음을 얼마나 졸였니 어쩌니 하는 그 문제로. 낡은 패턴을 가진 그 말다툼 끝에, 둘은 약간씩 소스라친다. 환상을 깨고 나와 사실을 확인하는 건 정말 잠깐인데(둘의 경우, 그것은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시간 내내 옥신각신하기만 했어도. 둘 몫의 환상이 말끔히 깨지려면, 환상끼리 그 정도 강도로는 충돌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잠깐의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때, 환상이 관계에 입히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모든 게 없던 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언니는 자신의 새하얀 목을 감싸곤 했다. 관계를 이루게 하는 마지막 관문이라는 게 참 의외의 것이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피해 의식의 극복이라니, 라고 혼자 중얼대면서.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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