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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07. 2017

호민아 너는 어떻게

   “저기 앉으면 얼굴이 잘 안 보여서요.”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으며, 호민이 나직하게 말했다. 호민의 뒤로 스태프 이름표를 단 세 사람이 뛰어갔다. 촬영장 쪽으로 가는 듯했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호민을 바라보았다. 호민은 들고 온 책을 다시 펼쳤다.
   “뭐?”
   내가 호민에게 물었다. 호민이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 보았다. 호민의 뒤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세 번 연속으로 번쩍거렸다. 스튜디오 조감독이 촬영장 쪽으로 가다 말고 나를 한 번 돌아보았다. 조감독에게 눈인사를 보낸 내가 다시 호민을 쳐다볼 때까지, 호민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잘 안 보여서 왔다구요.”
   호민이 아까 한 말의 일부를 되풀이해 말했다.
   “내 얼굴? 내 얼굴이 잘 안 보여서 왔다고?”
   “그럼 누구 얼굴이겠어요.”
   어깨를 살짝 들먹이며 억양 없이 대답한 호민이 다시 책 속으로 시선을 쏟았다.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나는 오른쪽 눈두덩이가 갑자기 가려워 그곳을 긁었다. 촬영 현장 쪽에서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의자를 뒤쪽으로 물리고 내가 그쪽을 향해 대답하자, 호민이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호민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이리로 좀 와 보셔야겠는데요!”
   나를 부른 목소리가 내게 호출 신호를 보냈다.
   “아, 기껏 왔는데, 왜 가.”
   호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묻어나온 실망감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을까. 나는 “금방 올게.” 하고 대답한 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촬영 현장 쪽에서 영상 작업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안해 왔다. 나는 제작진 측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진행해 놓은 작업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수준의 제안이기도 했고.  
   내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호민은 다리를 꼰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쓰던 컴퓨터 키보드 옆에는 일회용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호민이 가져다 놓은 것인 듯했다. 
   “시끄러운데, 책에 집중 돼? 니네 팀 식구들은 언제 온다는데? 너 꽤 오래 기다린 거 같은데.”
의자에 앉으며, 호민에게 물었다. 호민은 대답 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들며, 일회용 컵을 내 손 가까이 놓아 주었다. 카페 이름이 까맣게 인쇄된, 길쭉한 일회용 컵 안에 든 건 커피였다. 스튜디오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커피가 아니었다.
   “이거 웬 거야?”
   “심부름 중인 건지, 뭔지, 어떤 스태프가 커피만 잔뜩 사 갖고 오길래요. 선배님 이름 대면서, 선배님 드릴 건데 내가 하나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스태프가 그러라고 하더라구요. 선배님 우유 들어간 커피 못 마시잖아요. 그래서 내가 얼른 하나 골랐지.”
   “니 거는?”
   “난 스태프가 사다 주는 커피 마실 급이 아니라서.”
   “먹을 거 갖고 급 나누면 서럽다. 컵 가져올게. 같이 마시자.”
   말끝에 내가 몸을 일으키자, 호민이 다시 눈을 찌푸려 뜨며 내 팔목을 잡았다. 그러면서 “됐어요. 이거 식어요. 벌써 많이 식었는데. 빨리 마셔요. 난 알아서 할게.” 하고 말했다. 그런 뒤 책을 엎은 호민은 “금방 온다더니,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하고 중얼거렸다. 호민의 곧은 눈길이 내 눈동자에 틀어박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내 가슴이 뜨끔거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내가 의자에 다시 앉자, 호민은 눈을 여러 번 깜박거리며 꼰 다리를 풀었다.
   “일부러 일찍 온 거예요.”
   엎어 둔 책을 뒤집었다가 다시 엎으며, 호민이 말했다. 나는 호민에게 왜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왜냐는 내 물음이 끌고 올 호민의 대답을 얼추 알겠으니까.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윤곽이 흐려진 현실이 뒤로 살짝 물러나는 것도 같았다. 호민이 내게 많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뜻이 분명하거나 마음을 환히 드러내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호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들은 번번이 내 명치를 시큰거리게 만든다. 나를 어떤 구덩이로 퍽 밀어버리는 것 같다. 이런 지 좀 됐다.
   좋아한다는 그 흔한 말 한 마디 없이, 호민은 자신이 나에 대해 품고 있는 모든 종류의 호감을 다 보여 주었다. 나는 호민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호민도 아는 것 같다. 그런데도 호민은 우리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는다. 평소처럼 무심하게 다가와, 무심한 몇 마디를 던지고, 무심한 눈빛을 던지고, 무심한 손길로 내 어깨를 두드리거나 내 손목을 살짝 쥐고, 무심하게 간다.
   그런데 그 선선한 무심함 때문에 내 마음은 자꾸 더워진다. 그 차분한 무심함 때문에 나는 자꾸 허둥거리게 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호민은 그저 무심히 내 곁에 머물다 갈 뿐인데, 내 곁에서 요란하게 머물다 떠난 누군가의 빈자리보다 호민의 빈자리가 더 크고 허전해서 자주 난감해진다. 

   “빨리 마셔요. 또 누가 불러대기 전에. 하여간 말 진짜 안 들어.”
   호민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내게, 호민이 채근했다. 내가 뜨뜻한 일회용 컵을 움켜쥐자마자, 스튜디오 출입문 쪽에서 누군가 호민의 이름을 불렀다. 호민보다 먼저 그쪽을 돌아보던 나는 뭔가에 켕겨 하는 눈으로 호민을 쳐다보았다. 호민은 나를 쳐다보며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왜, 가지 말까요, 나? 뭘 그렇게 놀라?”
   웃음을 추스르며 호민이 물어 왔다. 내 왼쪽 눈이 아까보다 작아져 있는 듯했다.
   뭔가가 제대로 시작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민의 팀 식구들이 호민을 데려가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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