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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12. 2018

나와 비슷한 사람, 나와 다른 사람


1. 


뭘 하나 하면 꾸준히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그런 사람에 가까울 때 나 스스로를 제일 좋아하기도 한다. 진득한 구석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매력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매력적이지 않다. 나에게는 그렇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끌리는 사람에 가깝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물론 그 사람이 자발적으로 그 방향을 택했을 때에 한한다)과 나란히 걷고 싶어 하는 경향이 내 안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한편 ‘뭔가를 꾸준히 하는 것’과 ‘뭔가를 꾸준히 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다르다. 나는 뭔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낼 것에 대해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기대는 당사자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 아닌 사람이 그런 기대를 가져 주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꾸준하게 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내가 그런 종류의 성공을 이루어 본 적이 없어서, 성실한 사람의 성공을 미리부터 빌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중압감을 얹는 일인지 알고 있다. 자기가 열심히 하는 만큼 일의 결과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이라, 나는 상대가 자기 일에 정직하고 부지런할수록 그의 일에 관한 말을 아낀다. 무슨 말을 들어도 부담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는데, 내가 하필 그 시기에 상대에게 쓸데없는 말을 보태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미래에 반드시 성공할 거라서, 내가 당신의 진중함과 성실함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라는 언질을 해 두는 건 생각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 옆에서 콩고물이나 주워 먹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성공을 통해 내 자존감 내지는 자신감을 채우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성공을 전제하고 당신의 과정을 응원하는 게 아니다.’라고 상대에게 확신을 주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당신이 만들어 낼 결과가 아니라 당신의 행위 그 자체를 응원한다.’는 말이 믿어지는 경우는 뜻밖에도 드물었다. 나도 그런 말을 간단하게 믿지 못할 때가 많다. 겉으로는 믿는 척할 수 있지만, 속으로는 어느 정도 미심쩍어 했던 것이다.


불투명한 내 미래를 벌써부터 좋게 말하는 사람이 막연히 반가웠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의 전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주 조심스럽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내 마음이 쉽거나 간단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에 관한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가장 특별한 사람의 언어로 바꾸는 것은 정말 작은 디테일의 차이인데, 그 미미한 디테일의 차이를 찾아내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절대 미미하지 않은 노력이 투자되어야 한다.


사람을 알려면 사람을 수없이 보아야 하고, 거기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것들을 선명하게 느껴야 한다. 자꾸 그래 버릇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보내는 중요한 사인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관계에 대한 감각 기능을 비롯한 모든 감각 기능은 연습으로 단련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천적으로 공감 능과 이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타고남의 차이는 노력의 차이로 극복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빠르게 되거나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에 진심이 있고, 진심으로 보내는 열띤 극복 과정은 상대를 충분하게 감동시킨다. 변화 그 자체보다 변화를 향한 절실함이 더 큰 감동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 내가 정말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쏟은 것이 관계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줄 때가 많았다(물론 이 노력이 ‘노력하는 시늉’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각자의 작은 한계를 하나씩 무너뜨리며 조금씩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목표치는 언제나 멀고, 오늘 나의 가능성을 보여 줄 시간은 오늘로 충분하다. 


어떤 행동을 거짓으로 할 수는 있어도, 그 행동에 담긴 의도가 진실한지 아닌지 웬만한 상대는 읽을 수 있다. 진정성과 절박함은 말보다 앞선 표현이 되어 몸 곳곳에서 수시로 발산된다. ‘대충’이라는 말의 의미가 정확히 어떻게 된다고 짚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적지만, 누가 대충 하고 있는지 누가 열심히 하고 있는지 가려내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별로 없다.   


2.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만약 그게 정말로 그런 거라면, 실제로…….”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말을 해 주는 사람에게서 간혹 커다란 도움을 받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현실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주는 사람. 


생각이 생각 안에만 있을 때는 그게 어떻게 잘못된 건지 잘 모르는데, 생각을 현실 장면으로 옮겨 놓으면 그게 어떻게 잘못된 건지 어느 정도 보인다. 생각의 틀과 현실의 틀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생각은 내 위주일 때가 많았고, 현실은 나의 편의와는 상관없는 거여서.


내가 어떤 생각을 지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실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인데,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내 실생활에 오히려 해가 되고 있다면? 나는 내 사고방식을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수정은 언제나 더디고 어렵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형체가 없으면서도 까다로운 일이며, 꺼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처럼 생각이 휙휙 바뀌지는 않는다. 물론 내 생각을 확 틀어 버리고도 남을 엄청난 사건을 겪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다. 


나는 대체로 추상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며 유년기와 성인기 초반을 보냈다. 나쁘게 말하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 나는 지나치게 현실주의적인 사람을 싫어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사람들은 대게 현실주의자였다. 균형이 깨져 버린 내 사고방식을 그들이 순간순간 바로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나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주는 순간에도,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와는 생각이 너무 다른 부류인 그들을 불편해 하면서 내 오류를 인정했을 뿐이다. 


현실주의적이면서 괴팍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들 말이 옳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삶이 완전히 틀렸다며 나를 몰아붙이는 그들 태도에 성질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과의 불쾌한 시간은 ‘좋은 의도가 들어 있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는 법’에 대한 생각을 오래 하도록 만들었다.


3.

     

나와 비슷한 사람도, 나와 다른 사람도, 나에게 저마다 유익한 뭔가를 제공한다. 나와 비슷하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고, 나와 다르지만 크게 거부감 들지 않거나 호감 가는 사람이 있기도 한데, 그건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말하는 태도는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는 모든 방식’을 의미한다. 인간적인 훌륭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 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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