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이로운 Aug 16. 2018

삶은 발견의 연속이다


삶은 발견의 연속이라는 문장이 별안간 떠올랐다. 이 문장을 언젠가 어느 책 속에서 봤던가. 아니면 이 문장은 단지 내 무의식이 별 뜻 없이 조합해 낸 단순한 문장에 불과한가. 아무튼 삶은 발견의 연속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의 정확한 뜻이 뭘까. 내가 알고 있는 발견의 뜻이 정확한 뜻 맞을까. 나에게는 무엇이 발견이었나.


발견(發見)이라는 말은 ‘드러내어 보다. 밝혀서 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런 의미가 나온다.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지정해 놓고 있다.


‘미처 찾아내지 못했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뭔가를 찾아내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발견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 왔나. 나는 반드시 새로운 것만 발견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나에게 발견이란 ‘내 의도에 의한 목격, 내 의도와는 상관없는 목격’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매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다. 매일 나는 뭔가를 보고 듣고 맡으니까. 뭔가를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맡게 되니까(나에게는 시각적인 발견만 발견인 게 아니라, 모든 감각적인 발견 또한 발견이다). 


방금 나는 내 생활 속 발견이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었다. 그래서 ‘삶은 발견의 연속이다.’라는 문장이 두 종류의 삶을 암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체로) 자발적인 발견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삶, 수동적인 발견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삶.


굳이 자기 삶 앞에 어떤 포부를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별도의 목적의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삶은 발견의 연속이다. 아무도 태우지 않은 돛단배가 물살에 밀려 온 바다를 유랑하듯이, 목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세월과 상황의 바람에 쓸려 여러 곳을 배회한다. 


그와는 반대로, 뚜렷한 전술과 전략을 스스로 세워 놓고 살아가는 사람 또한 인생에서 다양한 순간들을 경험한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주도적인 발견의 연속이다. 이것은, 돛단배 위에 탄 사람이 스스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 나아가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삶은 완벽하게 나누어질 수 없는 것 아닐까. 사람은 어느 때 강력한 목표 의식을 지닌 채로 살다가, 어느 때에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한동안 쉬엄쉬엄 살아간다. 물론 자신의 다양한 목적을 향해 평생 동안 전력 질주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람은 휴식기와 활동기를 번갈아서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삶을 자기 생활에다가 어떤 비율로 구성해 넣느냐에 따라, 우리는 적극적인 사람으로 분류되거나 소극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 구분마저도 아주 상대적인 거여서, 어딘가에서 적극적인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또 다른 곳에서는 소극적인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삶을 일구어 나가는 우리 각각의 방식에 대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 너는 그 귀한 시절에 그렇게 미적미적 살아가느냐고? 왜 너는 그토록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밖에 못 쓰냐고? 전부 개소리다. 삶의 방식에 정답이 어디 있다고. 


절대적으로 올바른 기준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를 두고 올바른 기준 운운하게 되는 병에는 약도 없다. 그러니 수많은 인생의 평균적인 모습, 가장 일반적인 모습 등을 올바른 모습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저질 의식은 싸그리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걸 우기는 사람들이 소수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이 사회는 시절마다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등등)에 해야 할 일들’, ‘올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꼭 해야 할 일들’ 따위의 기준을 세워 놓고, 사람들이 그 기준을 그때그때 착실히 수행하기를 바란다. 그걸 알맞게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취급하거나, 어딘가 결함 있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사람마다 가진 성향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서 뭔가를 행하고 이루는 모습과 양상이 모두 제각각이건만. 


사회가 만든 투명한 유니폼을 나도 입어야 한다며 내 등을 떠미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는 일은 정말 피곤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런 사람들을 꽤 자주 만나며 살아가게 된다. 꼭 나보다 훨씬 어른인 사람들만 나에게 그런 걸 강요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만든 투명한 유니폼이라는 건 생각보다 엄청나게 다양하니까. “나이 더 들기 전에 너도 결혼해야지, 얼른.”, “네? 그 나이에 또 결혼을요?”, “출산 계획은?” “첫째만 놓고 끝? 둘째 생각 없는 건 아니지?”, “더 늦기 전에 안정적인 직장 잡아야 하지 않겠어?”, “너 정도면 그런 데 말고 다른 쪽 일할 수 있지 않니? 재능이 아깝다, 얘.”, “남자라면…….”, “여자라면…….”, “어머니라면…….”, “아버지라면…….” 같은 것들만 사회의 투명한 유니폼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SNS가 널리 보급되어 사람들이 타인의 삶을 더 깊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 후로, 세상이 급속도로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들 하는 건 따라서 해야 하는 분위기가 이전보다 심화된 것 같다. 어느 도시를 가건 그 도시가 그 도시 같다. 당장 유행하는 형태의 식당, 놀이 시설, 카페, 휴식 시설 같은 게 모든 도시에 쫙 깔려 있다. 프랜차이즈 시설이거나 원조를 교묘하게 흉내 낸 시설이거나.


지금 우리 사회는, 영향력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발견한 것을 나머지 사람들 또한 열광적으로 발견하도록 만드는 시스템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너 그거 봤어?”

“너 그거 먹어 봤니?”

“너 거기 가 봤어?”


물론 당장의 유행과는 상관없이 (나처럼 그런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거나, 그런 시류를 좀 피곤해하며)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이렇게 지낸다고 해서 저렇게 지내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틀린 게 아니니까. 나도 한때는 유행 쫓아다니는 재미를 취미 삼아, 남들 하는 건 다 해야만 마음을 놓고 살았으니까. 다수라는 집단에서 이탈되면 큰일이라도 날 거라고 생각해, 항상 주변의 변화를 예민하게 살피면서. 


다만, 나는 ‘소수의 발견을 다수가 다시 발견하는 형태의 유행만큼, 각자가 각자의 새로운 발견에 집중할 수 있는 형태의 유행도 균형 있게 번성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지금은 유행이라는 게 너무 극화된 것 같아서. “뭐가 유행한다!” 하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TV를 봐도 그런 느낌을 받고, 인터넷을 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도 세상이 이랬었나. 아니면 내가 지금 이걸 갑자기 확 와 닿게 느끼는 건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맛없는 음식이 있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재미없는 영화가 있다. 그래서 지금은 뭔가를 해 보려고 할 때, 선택의 기준을 되도록 내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많이 한다. 어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는지 확인하는 게 아니라, 나는 대체로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것에서 만족감을 느꼈는지 확인하는 것.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도전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점검하는 것.


오늘 내 하루는 어떤 발견의 연속이었나.



신간 산문집 《내가 나라서 진짜 괜찮았으면》 미리 보기 및 구입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공감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