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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01. 2018

공감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흥분하면서 말하면, 내 이야기를 듣던 상대도 덩달아 흥분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말하면, 내 이야기를 듣던 상대도 별다른 흔들림을 보이지 않는 경우 또한 많다. 사람의 뇌에는 거울 신경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거울 뉴런’이라고도 하는 거울 신경은, 타인의 행동을 마치 내 행동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거울 신경의 활동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몰입하고, 그 몰입의 결과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공감 반응을 보이게 된다. 


거울 신경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심리학 책 속에서였다. 그리고 나는 실용 처세술을 다룬 책 속에서도 이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읽었다. 미국의 저명한 FBI들이 저술한 대인관계 간파 비법서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공감 능력의 생물학적 근거를 설명하고 싶은 사람들이 거울 신경을 단골 주제로 언급했다.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 속에 들어 있는 거울 신경은 꽤 훌륭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내가 내뿜는 감정이 그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배어나는 걸 느낄 때가 많으니까. 이걸 호의적으로 말하자면, 내 주변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내가 무슨 일 때문에 서럽거나 화가 나서 펄펄 뛰다가 거품 물고 뒤집어져도 ‘쟤는 그냥 저런가 보다.’ 싶어 하며, 무감각한 표정으로 대화 화제를 돌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비율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들의 주변 관계가 이렇게 양분될 것이다. 공감 잘해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공감과는 거리가 좀 먼 사람들과의 관계.


공감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것이 거울 신경 하나라고 할 수는 없겠다. 사람의 공감 능력을 이루는 요소는 너무 많아서, 한 곳에 몰아 놓고 일일이 꼽아 보기는 어렵다. 공감 능력은 전반적인 환경으로부터 길러지기도 하고, 특정한 경험으로부터 길러지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선천성과 후천성 모두 공감 능력에 관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공감 능력 결핍이 타고났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자기를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들과 친해지기를 꺼린다. 이런저런 노력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음’을 어필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머지않아 균형을 잃고 무너져 짐이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에 비해 공감 능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을 다짜고짜 원망하거나 경멸하지는 않는다. 내가 관찰하는 것은 공감 실력이 아니라 공감 실력에 대한 의욕이다. 의욕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거라서 관찰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조금만 신경을 쏟으면 타인의 의욕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의욕이 그 사람 행동으로 모조리 표출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의욕이 그 사람 밖으로 얼마간 뿜어져 나오는 것을 충분히 목격할 수 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내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 보고자 하는 사람의 열정도 어렴풋이 감지해 낼 수 있다. 건성과 정성은 아무리 아닌 척해도 표가 조금씩은 나고야 마니까.


물론 ‘관계에 대한 의욕만 갖추어져 있다면, 나는 모든 관계를 끝없이 지속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나도 사람이라서, 마음끼리 의미 있는 교류를 도저히 할 수 없는 관계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이런 건 말로 설명하기 복잡하고 어렵지만, 막상 관계의 당사자가 되어 보면 판단이 제법 분명하게 서는 문제다. 내가 상대를 싫어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니어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저마다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상대와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주고받을 수 있어야 만족하는지. 이 만족의 수준에는 올바름과 그름이 없다. 그 기준이 서로 잘 맞으면 관계가 오래 유지되고, 잘 안 맞으면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공감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유일한 답 같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인 듯 느껴 보기 위한 방법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방법은 저마다의 수준으로 유효할 것이다. 


내가 공감 능력을 기르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한 방편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것(여기서 간접 경험이란, 타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 영화 보기, 책 읽기 등이 되겠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일의 당사자들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볼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의 느낌에 대한 정보들을 많이 접할수록, 나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를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내 저질 공감 능력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감정 격차가 클수록, 나는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절감했다. 


나는 타인을 공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단지 내 감정을 타인에게 입혀 놓은 것일 때가 많았다.


세월이 한 겹씩 쌓일 때마다 나는 내 상황이나 결심에 따라 새로운 일들을 하게 되고, 내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이럴 때는 이렇게도 느낄 수 있구나.’를 다양하게 깨닫는다. 그 참신한 알아차림의 순간들은 또 다른 공감 능력 기르기의 재료가 되거나 ‘이렇듯 사람의 느낌이라는 건 무한대의 상황에서 무한대의 종류로 가능하니, 공감 능력이라는 건 완성될 수가 없는 것이겠다. 공감 능력에 관해서는 죽을 때까지 겸손하고 조심해야겠다.’를 새로이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자신이 상대의 마음을,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것에 무슨 실용적인 기능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그들은 본인이 대부분의 일을 마음 밖에서 해결해 왔다고 생각했고, 본인의 그런 패턴을 ‘이성적인 생활’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침묵했다.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공감 능력에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는 건 내 느낌일 뿐이니까. 누가 그들 의견에 동의해 줄 때마다 그들의 얼굴빛이 환해지는 것을 보았어도, 나는 그들에게 공감 관계의 효과를 내세우지 않았다.


공감의 표현이란 ‘표현하지 않음’으로도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을 요즘 들어 절실하게 느낀다. 당신 마음을 정말 내 마음인 양 느낀다면(또는 느껴 보려 한다면), 나는 당신 마음에서 우러나온 생각과 감정이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였을 때 내 마음 표면에 떠오른 ‘아니’라는 말은, 세상의 절대적인 기준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단지 내 마음에서 튀어 나온 말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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