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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Feb 13. 2019

문제에 대해 말하는 시기


   처음 맞닥뜨린 문제나 생긴 지 얼마 안 된 문제를 개선시키기 위해 내 목소리를 처음으로 낼 때, 나는 침착함을 그럭저럭 유지해 낼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필요한 만큼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수차례 마주했던 문제나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문제를 개선시켜 보자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낼 때, 나는 차분함을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통제력을 상실하기 쉬운 상태에 빠진다. 순간적으로 사나운 감정을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이런 거친 감정의 뿌리에는 '아, 내가 진짜 얼마나 참았는데.'라는 심리가 자리하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내 격렬한 문제 제기를 듣는 사람은 내가 그 문제를 얼마나 인내한 뒤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쟤는 뭐 저렇게까지 발광하며 얘길 하나.'라는 생각을 하거나 '이러다 괜히 싸움 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지목하며 거센 문제 제기를 하면, 내 지목을 받은 사람은 내가 언급한 문제의 성질을 헤아려 보기보다 나에게서 표출된 공격을 다루기에 바빠져, 상황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나는 그들이 무신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막상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면, 나도 갑자기 격분하는 상대를 불편해하거나 꺼릴 것이다. 그렇게 맘에 안 들었으면 처음부터 얘길 했어야지, 라는 불만을 토해 내거나.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어떤 문제를 인내한다 하더라도, 그 인내가 내 한계를 넘어가는 순간 나는 괴물이 된다. 내가 배려하고 존중하던 것들을 순식간에 망각하고 모두를 가해자로 내몰며 입으로 불을 뿜는 괴물.





   내 삶에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를 대하는 초기에 그것에 대고 "뭐, 내버려두면 차차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일은 그동안 나를 수없이 배반했다. 의문이나 반발을 만나지 않은 문제가 어느 날 저절로 개선되어 나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나는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문제 제기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나를 위해서도 그렇고 모두를 위해서도 그렇고. 





   뭐가 마음에 안 든다, 싫다, 나에게 해롭다고 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간단하지도 않다. 그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대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반대 의견이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인생은 낙관만으로 운영해 나갈 수 없는 것이고, 나는 나 자신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또는 더 나은 상황을 위해 때때로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까 말했듯,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진정한 의미의 평화, 진정한 의미의 안전은 모두가 "YES!"라고 말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충분한 만큼의 사람들이 그때그때의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YES!"가 필요한 곳에 "YES!"를 "NO!"가 필요한 곳에 "NO!"를 말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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