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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17. 2019

기대와 실망과 인간관계

  

1.     


“기대하는 건 잘 안 보이는데, 실망하는 건 너무 잘 보여. 아니 ‘너무’라고 하면 그런가. 그러네. 비교적 잘 보인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내가 독심술사는 아니니까. 전혀 아니지. 아무튼 기대랑 실망, 내용은 똑같고 표현만 다르게 한 건데. 기대감이 있었으니까 실망을 하는 거잖아. 기대도 기대를 보여주는 거고, 실망도 결국은 기대를 보여주는 거고.”


뭐 때문에 내가 그 말을 한지 모르겠다.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내가 그 말을 하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그 장면만 떠올랐다. 그 앞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뒤에 오는 장면은 어렴풋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질문을 받은 나는 더듬더듬 대답을 내놓고 있다. “가짜로 기대하는 척하는 건 쉬운데, 가짜로 실망한 척하는 거, 가짜로 실망하지 않은 척하는 건 어렵더라. 나는 그래. 그래서 누가 어디에 얼마나 실망하는지 잘 관찰해 놓으려고 하는 편이야. 그런 순간에 그 사람 진심이 많이 보이는 거 같아서. 이 사람이 나한테 뭘 기대했나. 이 사람이 우리 관계에 뭘 기대했나. 이 사람 말투 온도가 갑자기 식어 버렸다든지. 이 사람 시선의 폭이 갑자기 좁아져서, 이 사람 시선 밖에 내가 있다든지. 이 사람 얼굴 근육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그런 때 좀 깨어 있으려고 하는 편이야. 보이고 들리는 것들 기억해 두려고. 내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 대부분은 실망했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 않아서. 대신 속마음 몸 바깥으로 나오는 거 잘 숨기지도 못하고. 착해 빠져서 부정적인 거라면 밖으로 꺼내 놓을 생각조차 안 하는데, 그렇다고 거짓말도 못하는 그런……. 엉성한데 예쁘잖아. 몰라, 난 그런 것들이 왜 자꾸 예쁘지.”


그쯤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잠들었다. 새벽에는 세 번 넘게 깨어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어제 저녁 늦게 산책 끝내고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집 근처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밤새도록 울었다. 요란하게 애달픈 울음 소리였다. 내 몸이 아무리 고단해도, 누가 우는 소리는 성가시게 들리지 않는다. 신경질과 짜증을 유발하는 불쾌한 소음이 아닌 것이다. 우는 것이 인간이 아니어도. 우는 소리는 마음에 걸리는 소리지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다. 나에게는. 그 점이 늘 신기하다. ‘왜 울지.’ 그 생각만 들어서.


세 번째로 화장실에 다녀와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들었다. 보름이라 거실과 방 바닥에 회백색 타일이 깔려 있었다. 달빛이 다양한 네모로 집 곳곳에 깔려 있었다. 안경 없이 맨눈으로 보는 거라, 그 네모들 모서리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뿌옇게만 보여도 보름밤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 아름답고 환한 달빛 속에서 고양이는 왜 밤새 우는 걸까. 몇 주 전에 덩치 큰 고양이들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검은색 고양이를 본 일이 있는데. 그 애가 우는 건가. 그 애가 운다고 내가 뭘 해 줄 수 있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 다시 잠들었다.     







2.     


“내가 그 말 한 마디 했다고, 실망이라는 거야. 나한테 실망했다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말하고 있는 사람 얼굴은 기억의 프레임 밖에 있다. 다림질이 잘 된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그 사람 손목과 손만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사람 손 옆에 알록달록한 뻥튀기 과자가 소복하게 담겨 있다. 나무 그릇에. 과자 이름이 마카로니 뻥튀기였던가. 아무래도 술집에서 오간 이야기였던 듯하다.     


내가 가진 부분적인 측면을 보고 나라는 사람 전체에 대한 실망을 하는 사람이 있었나. 미지근해진 차를 마저 마시며 이른 아침의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본다. 


어렸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들 얼굴이 몇몇 떠오른다. 그들은 내가 가진 생각 하나, 내가 한 행동 하나, 내가 세운 계획 하나, 그런 지엽적인 것들을 보고 나서 나에게 실망감을 표출했다. 내가 첫 대학에서 자퇴했을 때,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 나에게 미친놈이라 한 친구도 있다. 행운을 제 발로 뻥 차 버리는 정신 나간 것이라고. 나는 불행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한 거였는데.     


나는 주로 어떻게 반응했던가. 나의 부분적인 측면만 가지고 나라는 인간 전체를 판단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런 상황에서 내가 느낀 건 대개 섭섭함이나 분노였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내 일부분만으로 내 전부를 단정할 때, 나는 섭섭함을 느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 대해 그런 단정을 할 때는 분노를 느꼈고. 







기억의 태엽을 계속 감는다. 20대 중반, 후반에 알고 지낸 사람들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나를 모르고도 나를 안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바짝 다가오거나 나를 떠난 사람들.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겠지. 나도 내가 당장 겪은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에게서 물러선 적이 적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감정이 판단력을 흐려서.     


말이나 행동은 그 사람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때로 그것들은 그 사람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성격이라든지, 됨됨이라든지. 그런데 말이나 행동은 때로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마음도 생각도 담고 있지 않은 말과 행동이 있다. 무의식의 접시에 담겨져 나온, 텅 빈 말과 행동. 


그런데 말과 행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모른다. 자기가 방금 들은 누군가의 말이 의미 있는 말이었는지, 의미 없는 말이었는지. 자기가 방금 겪은 누군가의 행동이 의미 있는 행동이었는지,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지. 모르니까 추측한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사람의 평상시 행실을 근거로. 그 사람에게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애매한 말과 행동은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된다. 그 모든 건 단순한 추측,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지만, 힘을 가지고 있다. 감정이 그 힘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오해가 시작된다. 간혹 그 오해는 확신이 되어 모든 설명과 설득을 물리친다.      


통제권을 벗어난 감정은 현미경이 된다. 세포처럼 작은 것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는 그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감정이 울타리를 깨부수고 날뛰며 하는 말을 전부 믿곤 했다. 제정신 아닌 감정이 하는 말을 신뢰한 것이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정도 생각도 내가 아니다.’ 

‘감정과 생각에 운전대를 내어 줘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꼬라박게 된다.’


그 생각들을 배우고 익히면서 수년을 보냈다. 큰 싸움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과 헤어지기 일쑤였던 나를 직면하는 것은 어려웠다. 대규모 갈등 생길 때마다 입 막고 땅에 발붙이는 연습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 모든 어려움보다, 뒤늦은 후회로 인한 고통이 더 컸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터지면 터진 머리를 꿰매고 다시 내 자리로 와, 직면과 연습을 계속해 나갔다.      


지금은 내가 감정적인 상태가 되었다는 느낌을 최소한은 감지해 낼 수 있다. 명치에 불이 붙고 뱃속에서 산사태가 일어나는 순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최소한은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내 감정이 제자리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그걸 인지하고 나면, 내 눈앞으로 펼쳐진 수많은 것들의 중요도 차이를 무시하려고 한다. 감정이 보여주는 것들 대부분이 허구이니까. 


괴물이 된 내 감정이 나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이거였다. “빨리 뭐라도 선택해!”


옛날에는 내 감정이 빨리 뭐라도 해결하게 해 주려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내 감정이 내 편이어서 나를 부추기는 줄 알았는데. 슈퍼맨으로 변신한 줄 알았던 내 감정이 사실은 독침 뱉는 괴물로 변했다는 사실을 나는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락부락해져서 집을 뛰쳐나간 감정이 휘젓고 다닌 자리에 남은 것은 관계 사망 신고서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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