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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Nov 28. 2023

투명한 전의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무도 일기_2023년 11월 27일

몇 주 전부터 도장에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마지막 타임에 사람이 제일 많은데 아이들도 많고 아주 정신이 없다. 추석이며 휴가며 이래저래 관원 없이 한갓지던 시절보다는 더 신나긴 하다. 오랜만에 도장에 돌아온 아이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사람이 없다고 아쉬운 얼굴을 할 때마다 마음 한켠이 욱씬 슬펐으니까. 그게 마치 내가 수업을 잘 이끌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B코치님이 도장에 오신 뒤로 분위기가 활발해졌다. 시기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다.


지난주에는 서울컵 대회가 있어서 또 카메라를 들고가서 관원들을 사진에 담았다. 출전한 관원들 중 유일한 십대 선수였던 M은 이번이 첫 시합이었다. 첫 시합이었으니 만큼 큰 기대는 서로 하지 않았다. 그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시합을 치르고 내려오길 바랄 뿐이었다. 기술을 걸어보진 못했지만 나름 상대의 기술에 몇 차례 잘 버티다가 절반을 하나 주고, 마무리는 안뒤축 후리기로 깔끔하게 한판을 내주며 끝났다. 그래도 첫 시합인데도 떨지 않고 의연히 매트에서 대련을 하는 M이 사뭇 대견해보여서 그저 뭉클했다.(나는 전날 과음하고 늦게 자고 오전부터 부랴부랴 잠실학생체육관으로 달려갔던 터라, 사고와 감정이 고장나 있었던 것 같다. 경기를 끝낸 M이 아쉬운지 머쓱하게 웃으며 사이드석에 있는 B코치님을 향해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며 어딘가 울컥한 마음이었다.)

M은 시합 준비로 대련을 하다가 다친 손가락으로 내내 아파하고 고생했는데, 시합을 끝내고 난 오늘 도장에서 본 M의 손은 다행히 제법 나아 있었다. 그간 꾀병이었냐고, 모쪼록 다행이라고 다독였는데 웬걸, 차례대로 메치기를 하다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뒷목에도 충격이 전해졌는지 아파하며 잠시 벽에 기대 쉬어야 했다. 검은띠였던 상대는 왼손잡이였고 머리 위로 뽑아서 업어치기를 하고는 M을 낮게 감았다. M은 늘 부드럽고 능숙하게 잘 받아줘서 받기를 해줄 때마다 안심하곤 했는데... 이 또한 내 주의력과 경험 부족 탓일 터다. 순식간에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능숙한 지도자라면 그 짧은 순간 위험을 알아차려야 한다.


운동을 끝내고 모든 관원들을 보내고 청소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 부족함으로 누군가 다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내 나약한 정신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 터다. 죄책감이 자꾸만 숨을 조인다. 도장 안에 나를 둘러싼 거울들이 무섭다. 벽에 기대 선 더미 인형이, 그 눈없는 얼굴이 나를 원망스레 노려본다.

지혜로워져야 한다. 나이가 들고 단이 올라갈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이제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직급과 책임이 생기는 지금의 내가 버겁기만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회사에서는 밑으로 두 명의 사원이 생긴 대리이고, 도장에서는 이제 4단이었다. 어느 정도 내 기술에 확신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디자인이든, 유도든. 나는 그게 무거워서 짓눌리는 기분이다. 중압감과 부끄러움에 다 내던지고 사무실과 도장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M은 목을 주무르면서도 마지막 타임이었던 다음 타임까지도 즐거이 운동하고 갔다. 시합을 한번 나가고 나니 유도에 대한 마음이 더 불타오른다며 희고 여린 얼굴로, 투명하고 순수한 전의를 고백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또 나는 마음이 물컹물컹해졌다.


내일 아침에 M에게 연락해서 안부를 물어야겠다. 아마 묵직하고 뻐근할 거라고. 부디 괜찮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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