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버리기 어려운 회색이 있잖아요.

당신의 "도복"은 어떤 색인가요?

by 무도인 박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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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에 살았던 5년 동안 복싱체육관을 다녔다. 복싱은 생활체육으로 두루 자리잡은 스포츠이다 보니 체육관에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는데,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관원이 한 명 있다. 그는 운동이라고는 한번도 안 해봤을 것 같은 가냘픈 체격으로 줄넘기 3라운드를 이악물고 힘겹게 해내는 입문자였지만, 장비 하나는 기가 막혔다. 대개의 입문자들이 쿠션감 있는 일반적인 기능성 운동화를 신고, 끼고 벗기 수월한 벨크로로 팔목을 여미는 글러브를 사용하는 데 반해, 그는 아디다스 복싱화를 신는 데다가 벨크로가 아닌 무려 끈으로 묶는 글러브를 착용했다. 끈으로 묶는 글러브는 보조 벨크로 장비가 없으면 혼자서 글러브의 팔목 부분을 여미기가 어렵다. 결국 그가 글러브를 낄 때면 코치님이 줄을 당겨 묶어줘야 했다. 그때마다 짓궂은 코치님은 “장비는 프로야, 프로.”라며 그를 놀렸고, 어설프게 미트를 치던 그가 지쳐서 헐떡이기라도 하면 “아니, 장비만 프로면 뭐하냐고.”라며 면박을 줬다.

시끄러운 체육관 음악 사이로 면박 주는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그가 머쓱할까봐 항상 마음이 쓰였다. 입문자가 좋은 장비 쓰는 게 뭐 어때서! 글러브든, 도복이든 마음에 드는 장비가 생기면 운동하는 시간이 한결 더 기다려지기도 하는데. 나는 그가 멋진 장비들의 버프를 받으며 무도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길 남몰래 응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체육관에서 자취를 감췄다.


복싱이든 유도든, 으레 운동을 하는 이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운동 장비 브랜드를 두루 알아보고 태를 갖추어 운동하는 이들이다. 쿠사쿠라, 미즈노 등 유수의 브랜드에서 나온 빳빳한 새 도복을 입고 머쓱하고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 관원을 발견하면, 호들갑을 장착하고 다가가서 “도복 사셨어요? 멋져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갖고 싶었던 도복을 큰맘 먹고 주문하고 어린 아이처럼 설렜을 그 마음을 상상하면 괜히 내 마음이 간질거린다. 아, 이렇게 귀여운 어른들이 유도를 하고 있구나. 내심 그 순수한 즐거움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그들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장비에 크게 욕심이 없는 유형이다. ‘진정한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의 마음가짐으로, 이들의 도복은 목깃과 소매 끝, 그리고 검은띠의 군데군데가 해지다 못해 터져서 하얀 속천이 드러나 있곤 한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너덜거리는 도복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바람의 파이터 같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보다못한 관장님이나 가까운 선배들이, 주인 없이 오래 방치된 도복이나 사이즈가 맞지 않게 된 도복을 그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바람의 파이터 짤.jpeg 영화 <바람의 파이터> 주인공 최배달의 낡은 도복 차림. '바람의 파이터'는 허름한 도복을 입은 이들에게 대명사처럼 붙여지는 표현이 됐다.(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나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어서 흰띠 때 받았던 연습용 흰 도복이 회색이 되도록, 약 7-8년 가량을 입었다. 8년이 넘어설 때 즈음 신입 관원이 내 도복을 보더니 “유도에 정식으로 회색 도복이 있는 줄 알았어요.”라며 농을 건넸다. 그렇게 회색이 된 도복과, 간간이 이곳저곳에서 넘겨 받은 낡은 도복들로 연명하며 지냈다. 오죽하면 한때 즐겨 입었던 청도복은 이곳저곳에서 버려진 도복들을 받아 입느라 상의는 대명스포츠, 하의는 제우스에서 나온 것을 섞어 입었다. 바지 길이가 맞지 않아 도복 업체 지인을 둔 선배가 바지를 가져가서 내 짧은 다리 길이에 맞게 잘라다 준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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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도복 ymca.jpg 종로 YMCA에 다니던 2016년 즈음의 사진. 곁의 흰 도복과 비교해보니 이미 이때부터 이 도복은 회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변에 쿠사쿠라나 미즈노 도복을 맞춰 입고 즐거워하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그닥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낡고 변색되긴 했지만 당장 운동하는 데에 크게 지장이 없어서 새 도복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매달 20만원 가까이 체육관 관비로 지출하고 있으니, 내 경제적인 여건에서는 취미 생활에 충분히 많은 소비를 하고 있었다. 나아가 ‘지금 도복을 산다고 해서, 내가 앞으로 몇 년이나 도복을 더 입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게 이십대 후반이었다. 그때는 내가 삼십 대 중반이 되도록 유도를 하고 있을 줄 몰랐다.


그렇게 낡은 연습용 도복 두어 벌을 번갈아 입으며 3단이 됐고, 우연히 좋은 기회가 생겨 평일 저녁에 잠시 유도장의 코치 일을 맡게 됐다. 주2회 정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도자로서 보냈던 몇 개월의 경험은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당시 일을 맡겨주신 관장님이 내게 일을 부탁하며 넌지시 야와라에서 나온 흰 선수용 도복을 선물해주셨다. (*유도복에는 연습용 도복과 선수용(시합용) 도복이 있다. 얇고 가벼운 연습용에 비해 선수용 도복은 질기고 두툼하며 그렇기에 가격도 더 비싸다. 두툼해서 상대가 잡기 어렵고, 입었을 때 각이 살아서 좀더 듬직하고 고고해보인다. 단점이 있다면 선수용 도복이 더 무겁고, 거기에 땀을 흘릴수록 더 무거워진다. 그렇기에 오히려 여름에는 연습용이 들고 다니기에도 편하고 입을 때도 가뿐하다.) 내게 있어서는 난생 처음 입어보는 새 도복이자 첫 선수용 도복이었다. 게다가 야와라라니! 시합을 출전할 때도 내내 흰 연습용 도복을 입고 나가야 했는데. 하얗고 견고하게 빛나는 새 도복의 자태에 눈 앞이 아득해졌다. 너무 감사하면서도 갑작스럽기도 해서 관장님께 도복을 주시는 연유를 여쭈었다.

“검소하신 것도 좋지만 3단, 나아가 이제 4단을 준비하고 계신데 그 정도의 단에 올랐다면 어느 정도 격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물밀듯이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거울을 보니 깨끗한 흰 도복을 받아들고 선 내 모습이, 흰 깃털을 들고 서 있는 작은 회색비둘기 같았다. 여태껏 “유도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단순하고 우직한 생각으로, 함께 운동하는 이들에게 예를 갖추지 못했구나. 3단, 4단이라는 타이틀에는 유도 실력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책임감이 필요했구나. 유도가 단순히 투기종목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예에서 시작해 예에서 끝나는 ‘예시예종’의 무도임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후로 야와라 청도복을 한벌 더 구매해서 번갈아 입었다. 빳빳하고 두툼한 선수용 도복을 입으면 내가 건담에 타고 있는 것처럼, 왠지 스스로가 거대해지는 기분이 된다. 내향적인 성격이기도 하고 당시 퇴근 이후 지친 상태로 코치 일을 하려니 버겁고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견고한 도복이 갑옷처럼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자신감이 없어질 때마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너가 배웠던 유도를 보여주면 돼.' 그렇게 나를 안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 즐겨입는 건 당시에 샀던 청도복이다. 청도복은 입고 있을 때 좀더 벽이나 사람들 사이에 묻혀서 내가 잘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색이 짙어서 때탈 걱정이 덜하기도 해서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해서 손이 간다. 선물 받았던 흰 도복은 때가 탈까봐, 아까워서 잘 입지 않는다. 그렇게 반듯한 새 도복이 여러 벌 생겼지만 여전히 낡은 회색 도복은 버리지 못했다. 해진 솔기마다 십여 년 전 낙법을 배우던 그 ‘처음’의 마음과, 여태껏 그 도복을 맞잡아 주었던 지나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고여 있어서일까. 누구에게나 버리기 어려운 회색이 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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