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결정은 처음이라
하혈을 했다.
입사한 지 고작 1년 반. 지난 연말까지 박 터지게 일하던 대규모 프로젝트가 끝이 났다. 브런치에 꽤 오래 글을 올리지 못한 것도 회사가 숨도 못 쉴 만큼 바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한 달 동안 쉰 날은 고작 하루였다.
올해 역시 이 프로젝트는 시작될 테지만, 1월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시기였다. 나는 작년 프로젝트가 끝나면 내 건강이 회복이 될 줄 알았다. 작년 내내 병원을 이곳저곳 끝도 없이 다녔고, 약도 늘 달고 살았다. 그래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어느 정도 내 건강 상태가 정상 궤도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몸은 내게 제발 좀 쉬라고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지난주 평일이었다.
작년부터 생리 기간을 맞추는 약을 처방받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약을 먹고 있는 도중에 하혈하는 것을 본 순간 내 이성은 그대로 뚝 끊겼다. 회사고 뭐고, 커리어고 뭐고, 퇴사 이유며, 내 앞으로의 일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아, 살아야 하는구나.'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도 이어지는 장염, 다 무너진 면역 체계, 이틀이 멀다 하고 아파오는 머리. 곧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아주 단단한 착각일 뿐이었나 보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퇴사하고 건강부터 챙기자는 말씀이 돌아왔다. 나도 이렇게 심란한데, 부모님 속이야 아마 더 뒤집어졌을 것이다. 스물 후반이나 되어서 또 이렇게 불효를 저지른다는 생각에 속상함이 차올랐다.
지난 주말 내내 뒤죽박죽 엉켜가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나는 늘 미래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말이 좋아야 '생각'이지, 아마 '걱정'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거다. 대학교 2학년 말이었나. 대학원에 가아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는 한 학기 휴학조차 두려웠다. '대학원 가는 데 휴학까지 하고 나면 아마 더 취업은 늦어지겠지.' 그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었다. 대학원 졸업 즈음에는 바로 이어서 취업하지 못할까 걱정이 또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막학기부터 논문과 취업을 병행했다. (이전 글에서도 이때 가졌던 한 무더기의 걱정을 잔뜩 써 내려갔었다.) 그만큼 나는 현재의 내 행복, 내 상태보다는 늘 '미래의 나'에게 초점이 맞춰있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가 꽤 뿌듯하다.
퇴사.
살면서 처음으로 미래가 아닌 현재를 보고 한 결정이었다. 용기를 낸 내가 좀 자랑스럽기도 하다. 퇴사를 결정하는 것이 어려웠지, 막상 결정하고 나니 오히려 걱정과 두려움은 쏙 들어갔다. 내가 더 움직여야 내 생활과 삶이 유지된다는 걸 너무나도 알기 때문일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더 정리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퇴사 후 낙원이 펼쳐질 것 같지만, 아마 지옥일 거라고. 이직할 곳 없이 무작정 퇴사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나처럼 이직이 아닌 쌩 퇴사를 하고 나서, 혹은 결정하고 나서 괜히 욱한 마음에 퇴사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평생직장'이란 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우리는 꼭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으며,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많다.
물론 꼭 이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너무 힘들고 벅차다면 잠시 멈춰 설 수도 있다.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어린 날의 객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그 무모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어린 날의 객기 역시 어리니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무모함도 객기도 모두 좋다. 누군가에겐 그리 보여도, 누군가에게는 용기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그 용기를 낼 때라고 생각한다.